청춘의 아이콘 신성일, 거목이 쓰러지다
<하재근의 닭치고 tv>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 그래라”
신성일은 1957년 26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 오디션에 합격해,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에서 둘째 아들로 데뷔했다. 이때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강신영이었던 그에에 ‘뉴(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라는 의미로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964년 ‘맨발의 청춘’을 통해 그야말로 당대를 대표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요즘은 우리가 미남미녀의 표준을 우리나라 배우, 가수들에게서 찾지만 과거엔 서양 연예인을 미의 표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에 미남의 표준이라고 흔히 거론됐던 사람이 알랭들롱인데, 신성일이 바로 한국의 알랭들롱이라고 불렸다. 그럴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맨발의 청춘’으로 상처 받고 좌절하는 젊은이를 연기해 청춘을 상징하고 시대를 위로하는 국민배우가 되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194편 중 324편에 그가 등장했다고 할 정도로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위상이었다. 그의 전성기는 70년대까지 이어져, ‘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 같은 전설적인 히트작들을 만들어냈다. 80년대엔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 출연하기도 했다. 주연작만 507편이고 상대 여배우가 연 119명에 달한다.
신성일은 마지막까지 영화만 생각했다고 한다. “까무라쳐서 넘어가는 순간까지 영화 생각만 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이걸 먹어야 촬영을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며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고 엄앵란은 전했다. 김홍신 원작의 영화를 내년에 제작할 계획까지 다 세워놓은 상태였다. 신성일은 생전에 "난 '딴따라'가 아닙니다. 종합예술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라고 했었다. 60년대에 한국영화계에 필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필름공장을 건립하려다가 사기를 당해 1억원을 날리기도 했다.
배우로서의 전성기가 끝난 후엔 영화규제제도를 영화계에 유리하게 만들겠다며 정계에 도전했다. 하지만 81년 선거 패배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됐고 엄앵란이 식당을 경영하며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후 2번 더 도전해 마침내 2000년에 국회입성했지만 불법 정치후원금으로 2년여 간 수감됐다. 이때 감옥에서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읽고 말년의 그를 대표하는 스타일인 파마머리를 선택하게 됐다. 실패로 끝난 정치 외도 후 그는 영화에 열정을 불태우며 내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신성일은 엄앵란과의 부부관계로도 유명하다. ‘로맨스빠빠’로 만나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이들은 바로 그해 11월 14일에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 수가 3천4백 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그야말로 대혼란 사태가 터진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생활이 아니었고 최근 들어 엄앵란이 주부토크쇼에서 한풀이 토크를 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엄앵란이 유방암으로 쓰러지자 신성일이 달려와 병간호를 했고, 신성일이 폐암으로 쓰러지자 엄앵란이 병원비를 대며 보살폈다. 요즘 신세대 감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의 유대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앵란은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동지적 관계’라고 표현했다.
“내가 존경할만한 사람이라 55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엄앵란의 말이다. 방송에선 신성일 험담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신성일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 기본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신성일은 20여 년 간이나 시대를 대표했던, 앞으로 다시 나타나기 어려운 대스타였다. 그 시대를 함께 한 이들 사이에선 신성일의 존재감이 엄청날 것이다. 그런 거목이 세상을 떠났다.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 그래라” 엄앵란에게 전해달라며 신성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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