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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의 무예이야기 <14>


입력 2007.10.20 09:07 수정        

태권도와 택견은 무예가 아니다.

신성대(辛成大)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대한십팔기협회부회장,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장. 우리나라 전통무예 붐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십팔기와 양생기공을 지도 보급중. 저서
해방 전후 최홍희(崔泓熙) 등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들어온 공수도(空手道), 즉 가라테가 1955년 태권도(跆拳道)로 개명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김용옥의 《태권도철학의 구성 원리》(1990, 통나무)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면 그 이전엔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국민 대다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태권도를 익힌 젊은이들까지도 전혀 몰랐었다. 지금까지도 태권도가 이 땅의 전통 무예인 줄로 착각(사실은 속은)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김용옥의 저서 이전까지 어떤 곳에서도 태권도의 원형이 가라테라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한결같이 고구려 고분의 수박희(手搏戱) 그림을 기원으로 삼고, 조선시대 <십팔기> 중 하나인 ´권법(拳法)´ 그림(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논리를 편다(물론 이때에도 십팔기란 명칭을 쓰지 않고, ´《무예도보통지》에서´라는 표현만을 쓴다. 일찍이 십팔기란 말이 시중에 없었더라면 아마도 이 권법이 태권도의 원형으로 정해졌을는지 모른다).

대학에 태권도학과까지 생기고,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이를 전공한 교수 또한 수없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거나 감추어 왔다. 이것이 어디 학문인가? 아니면 사이비(신흥) 종교인가? 동양 3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세계인들을 속일 순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어떻게 속인단 말인가? 식민 통치 시절 배워 간 가라테를 태권도로 개명한 것을 모르는 일본인이 있을까? 태권도 시범을 보면서 혹시 저것이 가라테의 원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있을까? 김치를 ´기무치´라 하며, 원래부터 일본 전통 음식이었노라고 주장한다면 한국인들이 믿을까? 아무래도 한국 사람만 속고 있는 것 같다. 이러고도 일본의 교과서 왜곡 운운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김용옥 교수에 의해서 비로소 밝혀지기 전까지 정말 아무도 몰랐던가? 실은 현재 5,60대 이상의 어른들과 무예계 사람들은 대부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태권도>란 말은 촌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때는 모두 <당수도(唐手道)> 혹은 <공수도(空手道)>라 불렀다.

그저 남 잘되는 일에 초쳐서 심보 고약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 나서지 않았을 뿐이며, 게다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 정권 차원에서 육성하던 스포츠였기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엔 마땅히 내세울 만한 국가적인 자랑거리도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던가. 대놓고 우기면 속아 넘어가 주는 척하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종종 배신(背信)보다는 불신(不信)이 더 문제가 된다. 배신은 분명하지만, 불신은 애매하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시절,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국풍(國風)´ 운동의 회오리 속에 그때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택견>이란 것이 갑작스레 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1983년 6월 1일)된다. 그리고 수년 동안 태권도의 원형이 바로 이 택견이라며 함께 잘 어울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택견이 태권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등을 돌려 독자적인 길로 가버린다. 사실은 엄청난 연관성(?)이 있는데도 말이다.

역시 김용옥 교수는 같은 책에서 태권도의 ´태권(跆拳)´은 ´택견´에서 차용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 놓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연관성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배경에는 태권과의 연관성(후원)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텐데도 말이다.

일본 기원의 무예가 온전히 ´우리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논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때로는 역사적인 조작이 필요하고, 자체적인 성격 변화도 필요하게 된다. 즉 본래의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것´으로 어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라테는 태권도로, 검도(劍道)는 일본 검도가 아닌 한국 검도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무예들의 한계는 무예 문화의 능동적 수입이 아닌 수동적 이식이라는 점에서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기능하였고, 사람들의 역사의식과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를 흐리게 함은 물론 무예 문화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깡그리 없애 버렸다는 데에 있다. 더불어 이러한 안목의 부재는 우리에게 끝없는 문화(무예)적인 열등감을 갖게 하였다.

해방 후 각 분야에서 이 땅에 뿌리 내린 식민 문화의 잔재를 없애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유일하게도 무예계에서만은 전혀 이러한 노력이 시도된 예가 없었다. 오직 김용옥 교수만이 저서 《태권도철학의 구성 원리》를 통해 태권도의 뿌리는 바로 일본의 가라테임을 지적하였을 뿐이다. 그 주요 내용 몇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권도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의 수박도(手搏圖)가 태권도의 할아버지라든가, 각저총(角抵塚)의 각저도(角抵圖)가 그 한 모델이라든가, 신라의 화랑들이 익힌 무예가 바로 태권도라든가, 석굴암 입구 좌우에 버티고 서 있는 수문신장인 금강역사가 태권도의 상단막기와 하단막기 포즈를 취하고 있다든가 하는 등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기술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석굴암 금강역사의 포즈는 당대의 중국이나 일본의 금강역사상의 한 전형을 구현한 것일 뿐일진대, 만약 그것이 태권도폼이라면 동아시아 전체의 금강역사상이 일시에 태권도 국제 선수들이 되고 말 것이니, 국기원이나 WTF(World Taekwondo Federation, 세계태권도연맹)의 업무가 좀 바빠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나현성(羅絢成) 선생의 《한국체육사연구 韓國體育史硏究》에 나와 있는 전통 체육의 모두가 태권도와 관련된 조형(祖形) 및 발전으로 봐야 될 것이니, 이런 식의 일반론과 견강부회론을 나열하는 태권도사는 기술되어야 할 의미조차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전부는 전무일 뿐이다.”

“내가 도장 다닐 1960년대만 하더라도 ´태권도´라는 말은 대개 청도관을 중심으로 고집된 특수한 어거지 말이었을 뿐, 일반에게 가장 널리 쓰였던 어휘는 ´당수(唐手)´라는 한마디였을 뿐이다. 그외의 많은 명칭이 있었어도 일반 사람들 입에서 흔히 나오는 말은 ´당수´였다. 아마도 ´태권도´라는 말이 일반에게 보편화된 것은 ´월남 파병´이라는 사건이 그 계기를 이룬 것이었을 터이다.

월남 파병으로 전장병에게 태권도가 의무적으로 교육되고, 또 그것이 따이한의 심볼이 되고, 또 국군태권도시범단, 파월교관단의 국제적 활약으로 국내외적으로 그것이 보편화됨에 따라 ´태권도´는 양적 팽창을 하게 되었고, 또 우리나라 일반 국민 의식 속에 보다 포풀라할 수 있는 기예로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도장의 체계가 갖추어지고, 관의 체제가 정비되고, 또 다수의 관원, 또 상하 위계질서의 팽배에 따른 권위가 확보됨에 따라 태권도가 국기(國技)의 모습을 갖게 되고, 또 교육의 커리큘럼이 되게 됨에 따라 사정은 달라지게 되었다. 즉 해방 후 한국 역사의 일반적 분위기 속에서 어떠한 동기에서 출발했든지간에 순 ´왜놈´한테서 배운 것 가지고 폼잡기는 어려웠다. 족보가 온전히 왜놈 것이 되어 버리면 그것으로 주체적 권위의 심볼을 삼는다는 것은 남보기에 매우 꼴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인류 역사상 <태권도>라는 이름 석 자가 1955년 4월 11일 이전에는 도시 존재해 본 적이 없다. 우리가 태권도라고 부르는 모든 무술의 조형은 완벽하게 메이드 인 재팬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거짓말이 있을 수 없다!

태권도란 이름이 생겨난 것은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워 온 최홍희(崔泓熙)에 의해서였다. 1955년 당시 第三軍管區司令官이었던 최홍희는, 그해 4월 11일 大韓唐手道 靑濤館 第一回顧問會를 열어 ´跆拳´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당시 唐手道, 空手道, 拳法, 手搏道 등을 고집하던 他館의 반발 때문에 1961-1965년 8월까지는 ´跆手道´라는 말이 잠정적 타협 명칭으로 쓰였다.“


그는 또 태권도와 중요무형문화재 76호(1983년 6월 1일 지정)인 택견과는 실제적으로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음도 지적하였다.

일제시대 <제국신문> 주재(主宰)를 지냈던 최영년(崔永年)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1925년 4월 25일) 놀이〔遊戱〕편에 소개된 <탁견희(托肩戱)>는 정확히 말해 무예가 아니다.

이 책은 줄다리기(引索戱), 씨름(角抵戱), 손바닥때리기(手癖打), 돈치기(打錢戱), 제기차기(蹴雉毬), 강강수월래(强强曲), 연싸움(鬪風箏), 공기놀이(五卵戱), 팽이치기(氷毬子), 줄넘기(跳索戱), 그네뛰기(送唾韆), 널뛰기(跳板戱) 등등 온갖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를 모아 설명하고, 거기에다 저자가 지은 한시(漢詩) 한 수씩을 덧붙인 책이다.

무예서(武藝書)가 아니라는 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단 하나의 무예도 실리지 않았다. <수벽타>에 부친 한시에서 척계광(戚繼光) 장군이 운운하였듯이, 그가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몰랐다거나, 무예와 놀이를 구분할 줄도 모를 만큼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탁견>은 단지 마주 보고 서서 발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유희의 일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탁견희(托肩戱)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차서 거꾸러뜨린다. 세 가지 법이 있는데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상투에 떨어진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도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내기하여 빼앗는다. 법관으로부터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작난이 없다.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백 가지 기술 신통한 비각술
가볍게 상투와 비녀를 스쳐 지난다
꽃 때문에 싸우는 것도 풍류의 성격
한번 초선(貂蟬)을 빼앗으면 의기양양하다
百技神通飛脚術 輕輕掠過琦簪高
投花自是風流性 一奪貂蟬意氣豪



각저희(角円戱)
옛 풍속에 서로 부닥쳐 싸워서 승부를 결단하기 좋아했다. 이것을 씨름이라 한다.

붉은 다리 훨훨 피는 가슴에 넘치고
용기는 구정(九鼎)을 단번에 들기나 할 듯
방초(芳草) 푸르른 평평한 모래 벌판에
성난 소 뿔로 비비며 쌍쌍이 달려든다
赤脚僊僊血溢腔 勇如九鼎一時兼
一圈平沙芳草際 怒牛牡角赴雙雙



수벽타(手癖打)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는데, 예전에 칼 쓰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인데, 두 손이 왔다갔다할 때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에 어기면 곧 타도(打倒)당한다. 이것을 손뼉치기라고 한다.

검술은 먼저 손재주의 묘한 것으로부터 온다
척장군이 하마 군사에게 재주를 가르쳤다
세 절구에 만일 한 절구만 어긋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떨어진다
劍術先從手術妙 戚將軍己敎兵才
三節朧如差一節 拳鋒一瞥落頭來


저자는 택견, 수박, 각저가 무예가 아니며, 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옥도 당시 택견의 기능보유자였던 송덕기의 말을 그 예로 들고 있다.

“택견이 어떻게 해서 발생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한말까지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택견을 했었다. 나는 12세부터 필운동에 살던 임호(林虎)라는 택견의 명인을 만나서 택견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택견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술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가를 이용해서 운동하기 좋은 장소에 모여서 실시하던 일종의 민속놀이였다.”

그러니까 당사자조차도 민속놀이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가라테>를 <태권도>로 개명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1952년,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 전 해, 한국 전쟁의 전화 속에 국토가 휘말려 있던 어느 날, 제1군단 참모장이었던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가 길들인 당수도시범단의 시범 광경을 30분간 연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는다. 시범을 다 관람하고, 또 남태희가 맨손으로 13개의 기왓장을 일격에 완파해 버리는 것에 너무도 감명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국군이 이 무술을 익히게 하라고 고관 참모들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를 뜨면서 최홍희에게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택견이구먼!"”

자, 그렇다면 이승만(1875-1965)은 왜 가라테 시범을 보고서 "택견이구먼"이라고 했을까? 당시 그가 <가라테> 시범인 줄 모르고 관람 후 그 말을 했다면 말 그대로 <가라테>를 택견인 줄 오해해서 내뱉은 말일 것이고, 그게 아니고 가라테 시범인 줄 알고서도 한 말이라면 "택견 같은 것이구먼" 하고 뱉은 말일 것이다. 어쨌거나 구한말에 태어난 그는 ´택견´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최홍희는 일제 가라테로는 최고 권력자(더구나 항일 투사 출신)의 눈에 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포장지를 바꿔치기해 버렸다.

이렇게 생겨난 글자가 바로 ´태권(跆拳)´으로 ´택견´과 유사하게 억지로 조작해 만든 단어이다. 당연히 이전 수천 년 역사의 어떤 문헌에서도 단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우스꽝스런 순한국식 조어이다.

택견에 대한 자료로는 조선 말기 풍속화 두 장, 외국 선교사가 찍은 흑백 사진 한 장, 그리고 1925년 최영년이 만든 《해동죽지》 놀이편에 소개된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 명칭으로는 택견, 태껸, 탁견 등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가 1990년 새로이 나타났다. 만약 이것이 좀더 일찍이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매우 달랐을 것이다. 김용옥 교수조차 《태권도철학의 구성 원리》를 펴낼 때까지 몰랐었던 것 같다. 만약 알았더라면 보다 재미있게 논리를 전개해 나갔을 것이다.

바로 구한말 일제 시기의 국학자이자 우리나라 민속학의 선구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저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李在崑 譯, 1990, 東文選)가 번역 출간되면서였다.

이 책의 원전은 1930년에 출간되었다. 구한말 학자로서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을 지내면서 학문을 하여야 했던 이능화는, 스스로의 호를 ´무능(無能)´이라 지어 부를 만큼 자책하면서도 우리나라 종교.민속 방면에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저서 대부분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왜놈 밑에서 저술을 하여야 했던 그는 왜놈들의 말과 글의 사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렇다고 한글로는 책을 출판할 수도 없고 해서 거의 한문으로만 글을 썼다. 일반적인 우리말까지 모조리 한자로 억지로 표기하여 이두(吏讀)식 표기가 수없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한문학자도 그의 저서들을 번역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해어화사》의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알아듣는 꽃´ 즉 ´기생(妓生)´을 말한다. 조선기생사의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 이 번역서 18쪽에 ´미동(美童)´에 대한 주석이 나오면서, 택견의 연원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미동(美童)〕 세속에서는 비역(庇役)이라 칭하는데, 남색(男色)을 이른다. 중국의 상공자(相公者)와 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脚法), 속칭 택기연(擇其緣)으로 싸워 자웅(雌雄)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급기롱(給寄弄)이라 한다. 조선조 철종(哲宗, 1849-1863 재위) 말년부터 고종(高宗, 1863-1887 재위) 초기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바로 그 시기를 살았던 당대 최고 민속학자의 설명이니 이보다 더한 근거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책보다 수년 앞서 나온 《해동죽지》를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탁견(托肩)´을 따르지 않고, ´택기연(擇其緣)´으로 그 어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당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전 문헌들을 두루 섭렵한 대학자였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 역시 어렸을 적에 이런 놀이를 보고 자랐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가 어려워져 서민들이 살기 힘들어지면 성(性)풍속이 매우 문란해진다. 조선 말기는 나라가 피폐해져 백성들이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모두 다 먹고 살기 힘들어 딸을 낳으면 버리거나 관기(官妓)로 보내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했다. 그 바람에 어떤 고을에는 관기가 2백 명도 넘었다고 하니 관리의 부패와 백성의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당패, 남사당패, 걸립패 등 여러 유랑예인 집단들이 생겨나 기예와 함께 매춘(계간)도 함께 하고 다녔었다. 민속학자이자 문화재전문위원인 심우성(沈雨晟) 선생의 저서 《남사당패연구》(1974)에는 당시까지 현존했던 남사당패 출신들의 증언을 싣고 있는데, 당시의 풍속을 충분히 짐작케 하고 있다.


“남사당패는 ´숫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조직의 제일 말단인 ´삐리´는 전원이 여장(女裝)을 하고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짝을 이루었는데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일망정 암동모를 하나 이상 차지할 수 없었고,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인기가 좋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가 없고,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주는 얼마간의 노자가 수입원이 되었다. 이밖에 마을의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해우채(解衣債, 몸값)를 받고 빌려줌으로써 작전(作錢)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택견은 일종의 발차기(脚法, 脚術) 놀이임이 분명하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으로 누가 먼저 상대의 어깨나 상투를 맞히느냐로 승부를 다투는 내기 놀이였던 것이다. 물론 그 근원을 고구려 벽화나 십팔기 중의 <권법>으로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씨름 등 여타 다른 잡기나 놀이도 주장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유추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원이며, 그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 또한 분명해졌다. 게다가 이 놀이는 구한말 한양에서 한때 성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단편적이나마 택견에 관한 자료를 남긴 이들이 모두 한양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하나같이 무예와 놀이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당시 한양은 외세와 더불어 서구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고, 경제가 피폐해 서민들의 삶이 무척 곤고한 시기였다. 이 놀이패가 많이 노닐던 왕십리는 하층민과 하급 군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하릴없는 동네 아이나 건달들이 이 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네마다 건들대는 왈패들이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서로 겨루었다고 하지만, 당시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웠다고는 하나 조선은 엄연히 엄격한 유교 국가였다.

설마 양갓집, 아니 상놈의 여자라 해도 그런 짓거리로 여자를 빼앗거나 빼앗기는 작태가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능화 선생의 주장대로 비역질의 수단으로 사용한 데서 온 놀이임이 분명하다. ´미동(美童, 혹은 舞童)´이니 ´사랑하는 여인´이니 ´꽃´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삐리´의 완곡한 시적(詩的) 표현이다.

또 하나, 유숙의 그림으로 추측되는 〈대쾌도〉에는 씨름과 함께 택견이 묘사되어 있다. 장소는 지금의 광희문 밖쯤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놀이판들은 대개 성문 밖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벌어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택견은 씨름과 같은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씨름은 서로 껴안고 넘어뜨리기인 데 반해, 택견은 손을 쓰지 않고 발로 차거나 넘어뜨리는 발놀이였음도 짐작할 수가 있다. 어느 구석을 살펴도 택견이 무예라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다. 굳이 무예와 연관짓자면, 당시 근처의 훈련원(訓鍊院)이나 어영청(禦營廳) 등의 군영에서 있던 군사들의 권법 훈련 중 발차기 모습을 담 너머로 구경한 동네 아이들의 흉내내기에서 유래된 놀이로 짐작할 수 있겠다. 이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나온다.

선조 33년 4월에 비망기(備忘記)로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어제 중국 병사들이 진 친 곳을 보니, 그 중의 한 부대는 모두 목곤(木棍)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중국 조정의 말을 들었는데, 목곤의 기술이 장창이나 용검(用劍)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그 기술을 익히지 않을 수가 없다.

십팔기의 하나인 <권법>. 태권도와 택견도 권법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무예로서의 권법과 놀이나 호신술로서의 권법은 질적으로 크게 다르다.

또 권법(拳法)은 용맹을 익히는 무예이니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게 한다면 동네 아이들이 서로 본받아 연습하여 놀이로 삼을 터이니, 뒷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힐 아동을 뽑아서 종전대로 이(李) 중군(中軍)에게 전습(傳習)받게 할 것을 훈련도감에 이르라´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기효신서(紀效新書)》 가운데 목곤과 권법에 관한 두 도해에 표식을 붙여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법을 훈련도감에 보이라" 하였다.´


그리고 어느 문헌을 살펴보아도 군사들이 행하던 수박이나 각저와 택견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해동죽지》에 소개된 각저희는 분명 지금의 씨름이며, 수벽타는 손뼉치기 놀이이다. 마찬가지로 탁견희는 지금의 택견을 말한다. 다시 말해 분명 택견은 놀이의 한 종류로서 정식 이름을 얻은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수박과 택견의 연관성을 주장하지만 그것도 전혀 가당치 않은 것이다.

《해동죽지》의 탁견희 설명에서도 수박과 각저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들을 정확히 구분해서 싣고 있다. 설마 저자가 고대로부터 흔히 언급되어 온 각저와 수박을 몰랐을 것으로 짐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고구려 벽화 운운하는 역사 건너뛰기는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태권도와 택견은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무예(?)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비록 그 원형이 호신술의 일종인 가라테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강제 이식된 검도 및 유도와는 달리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자연스레 받아들여져 뿌리를 내린 태권도는, 개명(改名)을 하여 한국화한 정식 스포츠이다.

그렇지만 50년에 이르도록 그 역사를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 혹은 민족 무예의 지위까지 욕심내는 바람에 전통성은커녕 논란과 웃음거리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호신술이었을 때라면(지금도 수없이 많은 호신술이나 무예들이 생겨나고, 또 유통되고 있다) 그까짓 믿거나 말거나 한 족보니 원형이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조차 없겠으나, 제도권으로 들어가 세계적인 스포츠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역사에 대해 어물어물한다는 것은 떳떳치 못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에 대하여,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어느 개인이 판단할 문제가 아닐 터이다. 그렇지만 보유자 당사자의 말은 물론 그 어떤 문헌에서도 택견을 무예라고 칭한 적이 없고, 대신 놀이(演戱)라고 분명하게 명기된 것을 굳이 무예 종목으로 지정한 배경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아니면 당시의 문화재전문위원들이 무예와 놀이를 구분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하기야 놀이 종목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더라면 너도나도 몰려올 각종 전통 민속놀이 기능보유자들로 인해 담당 부처 문짝이 남아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택견이 전통 무예에서 출발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민속놀이화되었으니, 그 기원을 좇아 당연히 무예라 일컬을 수 있다는 몰상식한 주장도 더 이상 펼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한 논리라면 씨름이나 검무(劍舞) 또한 전통 무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식민시대 일제의 탄압에 의해 거의 사라질 뻔했다가 해방 후 복원하였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미 조선 말기에 풍기문란을 염려하여 관에서 엄금하였고, 또 신문화가 도래하여 전통적인 유랑예인 집단도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소멸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민족 무예라 하여 일제의 전통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한 탄압으로 비밀리에 전수되어 왔노라 하는 것은 더욱 유치한 과장에 불과하다. 무슨 대단한 민족 무예라고 일제가 두려워해서 단속했겠는가. 그저 도시의 시장 경제가 발달되면서 차츰 새로운 조직적인 주먹패(깡패)들이 생겨나 동네주먹(탁견꾼, 어깨)이 꼬리를 감추면서 함께 사라진 것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온전히 ´우리의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별 생각 없는 우리들끼리 집 안에서 꼽추춤 보듯 웃고 넘어가 버리면 별일 아니겠으나, 바야흐로 바깥에까지 들고 나가 민족 무예라고 자랑하겠다 하니, 혹여 무예에 안목 있는 외국인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민망스러움이 앞선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이를 ´맨손 무예´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은 데서 빚어진 오류이다.

애초에 맨손 무예란 성립될 수 없는 단어이다. 맨손 기술에 무예라는 단어를 덧붙인 예가 없다. 예로부터 수박이든 각저든 모두 권법 혹은 권술로 분류해 무예와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해 왔다. 태권도나 택견을 무예라고 주장하려면 먼저 무예로서의 충분 조건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동작으로 창, 칼, 봉 등을 다루는 병기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현재 상태로는 무예로서의 필요 조건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병기 기술로 도저히 연결할 수가 없는 품새와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가 기술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떠한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택견이 나날이 발전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정 목적은 멸실 혹은 변질될 우려가 있는 전통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보존코자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정할 당시의 형태에서 벗어나 계속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다른 형식으로 운용된다면 무형문화재 지정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된다.

여하튼 택견과 태권도는 서로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연관성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에 얽힌 이러한 사연 때문에 항상 함께 비교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택견은 태권도를, 태권도는 택견을 서로 흉내내면서 발전(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태권도는 발차기를 위주로 하면서 가라테의 품세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고, 택견은 ´결련택견´이니 하면서 태권도 경기를 흉내내어 놀이에서 호신술로, 또 경기 종목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택견은 씨름이나 깽깽이(닭싸움) 놀이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결련하는 놀이였는데도 말이다.

무예와 호신술, 그리고 놀이(잡기)는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분명하게 구분해 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러한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무런 역사적.문헌적 근거도 없는 온갖 전통 무예들이 끊임없이 복원(?)되고 있고, 또 앞으로 수없이 창안될(전통 무예가 창안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것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그 자신의 무예도 없이(모르고) 맨손으로 나라를 지켜온 줄 알고, 수백 가지 민속놀이 중 가장 비천한 것을 골라 2천 년 전부터 전해져 오는 유일한 민족 무예라면서 무예 종목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니 우습다 못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불과 백 년 전의 일도 제대로 모르면서 고구려 벽화를 들먹이는 역사 건너뛰기는 무지를 넘어 기만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2천 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조롱이자 자기 비하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주변 나라들이 만만히 알고서 얕보는 것이 아닌가.

공교롭게도 한반도 주변 4강국은 모두 한때나마 이 땅을 점령해 본 적이 있는 무(武)를 숭상하는 나라들이다. 맨손과 입으로 떠들고 싸우는 작은 나라를 어느 누가 두려워할까? 언제 그들을 상대로 투쟁다운 투쟁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택견>의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 대해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취소할 명분(실은 용기)이 모자란다면 종목이라도 ´무예´에서 ´놀이´로 바꿔야 할 것이다.

물론 ´태초에 무예가 있었다´고 할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기예(문화)가 처음부터 근사한 모습을 갖추어 태어난 것은 없다. 보잘것없고 미천한 것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조금씩 더해지고 꾸며지면서 성장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간의 간섭과 변질을 거듭하는 것이 문화의 속성일 터. 태권도가 이 땅에 뿌리를 내려 제 이름을 얻은 지 반세기, 그리고 1세기 남짓 만에 다시 태어난 택견이 진정한 국민의 스포츠(혹은 무예)로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연원과 역사부터 정확하게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온전한 우리 것, 혹은 전통적인 것이라야만 소중하고, 외래의 것이라 해서 다 하찮은 것은 아니다. 수준 높은 것이어서 더 귀하고, 낮은 것이라 해서 덜 귀한 것은 없다. 단지 스스로 그 뿌리를 감추려 하고 억지로 꾸미려 드는 처사가 부끄럽다는 말이다.

또 그런 일이 용인되는 우리 사회가 한심하다는 것이다. 무예는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미신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학문하는 자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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