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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봉준호, 아카데미 뺨 때려줬다

  • [데일리안] 입력 2020.02.11 08:20
  • 수정 2020.02.11 08:16
  • 하재근 문화평론가 ()

혁신적 작품에 상 확실하게 몰아줘야 한다는 바람 통해

‘기생충’, 무개념 로컬 영화제로 웃음거리 될 뻔한 아카데미 구원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이 2019년 5월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용산점에서 영화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이 2019년 5월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용산점에서 영화 '기생충' 언론시사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석권하는 ‘황당’한 성과를 거뒀다. 일반적인 부문들도 아니고, 아카데미 빅5라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성별 주연상 중에 연기상을 제외한 3개 부문을 싹쓸이했다. 역사에 남을 대기록이다.


영어를 쓰는 미국 영화라도 큰 성과인데, 한국 배우가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는, 한국 자본이 만든 영화라서 비현실적인 대기록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그 누구도 한국영화가 언젠가 아카데미를 받는데, 그게 주요상 4개 싹쓸이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대 기대치가 외국어영화상 정도였는데 정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원래 작품상, 감독상은 현지에서도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을 1순위로 예상했었다. 이미 미국 프로듀서조합상(PGA) 작품상과 감독조합상(DGA) 감독상을 ‘1917’이 가져갔고, 직전에 열린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을 싹쓸이했었다. 샘 멘데스는 데뷔작인 ‘아메리칸 뷰티’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을 석권한 전례가 있다. 현지에서 관록을 인정받는 감독인 셈이다.


게다가 ‘1917’은 아카데미가 사랑하는 휴먼 전쟁영화다. 서구인들에게 중요한 양차대전 중 하나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1917’이 작품상, 감독상 1순위로 여겨졌다. 다만 아카데미 회원들이 투표할 때 ‘1917’에 작품상을 찍고 감독상까지 찍기는 부담스러우니, 감독상은 ‘기생충’에 안배할 수 있겠다는 기대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마치 아카데미상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아카데미 맞춤형 스펙이 오히려 ‘1917’에 독이 됐다. 지금 아카데미 회원들이 원했던 건 그런 전통적인 공식이 아니라 변화였다.


보혁대결이 펼쳐진 한 판이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안정희구 세력을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혁신세력이 들이받았다. 혁신세력은 미국 백인 잔치라는 오명을 들었던 아카데미상을 ‘싹 다 갈아엎자’고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엔 바람이 불었다. 타자, 약자, 소수자, 여성의 입장을 더 생각하자는 ‘정치적 올바름’의 바람이다. 아카데미상과 그래미상에서 모두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 마블은 ‘어벤져스’ 최강 히어로를 여성으로 기획했다.


트럼프가 이런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트럼프가 워낙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고, 배타적으로 나오니 그에 반발하는 미국 예술인들은 그 반대로 가려고 했다. 타 인종에 대해 더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속에서 지난 아카데미상의 역사에 결별을 고하는 이벤트가 열릴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적절한 대상이었다. 아카데미 역사를 부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 있는 작품이 제3세계에서 나와야 했다. 그때 ‘기생충’이 등장했다. 아카데미가 울고 싶은데 봉준호가 뺨 때려줬다.


아카데미 회원들 사이에 ‘기생충’ 같은 작품이 나온 이상, 이번만큼은 전통적인 아카데미형 명작이 아닌 혁신적인 작품에 상을 확실하게 몰아줘야 한다는 바람이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 같다. 자고로 선거에선 바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여론조사 사이트도 감지하지 못했던 침묵하는 다수의 바닥 민심이 ‘기생충’으로 향했다.


트럼프와 불화하는 주요 매체들이 바람을 잡았다. CNN이 ‘이번 아카데미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는다면 세계 영화의 거대한 진보’일 거라고 보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생충’을 찍지 않으면 몰지각한 시민이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봉준호 감독의 언행도 적절한 자극제가 됐다. 미국 작가조합 각본상을 받은 후 “어떤 사람들은 장벽을 더 높이고 있지만 우리는 장벽을 파괴하고 깨고 싶어 시나리오를 쓴다”고 했다. 사람들은 트럼프 저격이라고 해석했다. 트럼프와 달리 장벽을 깨려면 백인 영어 영화를 제치고 ‘기생충’에게 상을 줘야 했다.


봉 감독의 ‘1인치 자막 장벽’, ‘아카데미는 로컬 영화제’ 발언도 그런 자극이다. 아카데미가 자막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즉 영어 영화에만 집중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계기가 됐다. 봉 감독의 자막 발언에 미국의 식자층이 환호하면서, 만약 아카데미가 ‘기생충’이라는 자막 영화를 무시하고 영어 영화를 선택한다면 ‘몰지각 무개념’이 되고, 아카데미상은 한낱 로컬 영화제로 낙인찍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동시석권이라는 상상초월의 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제 아카데미는 ‘기생충’에 상 몰아준 일로 두고두고 생색을 낼 수 있게 됐다. ‘기생충’이 무개념 로컬 영화제로 웃음거리가 될 뻔한 아카데미를 구원했다. 혹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는 아카데미가 ‘기생충’이라는 동아줄을 잡았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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