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중국 신문에서 독립군 전쟁사의 단서 찾을 수 있어
독립군에게 전멸당한 부대의 지휘자 실명까지 언급…이례적
한 독립유공자 후손이 청산리 대첩 이후에도 계속해서 당신의 조부께서 싸우셨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적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그 분의 말씀을 그냥 흘렸다. 그런데 얼마 전 1920년 청산리 대첩 이후 간도 참변 등에 대한 연구를 위해 중국 신문을 살펴보던 중 이상한 기사를 발견했다. 1920년 11월 말 중국 신문(‘길장일보’ 1920.11.25)에 ‘일본군 또 독립군에게 패배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20년 10월 말 독립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대첩을 거두었고, 이후에 또 다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독립군이 청산리 대첩을 거둔지 시일이 꽤 지난 때였다. 기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지역 역시 청산리 대첩이 벌어진 곳에서 북쪽으로 약 200Km 이상 떨어진 곳이기에 뭔가 이상했다. 심지어 기사에 따르면 단순히 승리한 정도가 아니라 일본군 부대는 독립군에게 전멸 당했으며, 이때 ‘단일’(丹日) 소위라는 지휘자까지 사망했다는 것이다. 독립군에게 전멸당한 부대의 지휘자 실명까지 언급한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일본군 부대의 전멸과 사망한 지휘자의 실명 언급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청산리 대첩 당시 천수평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전멸당한 것으로 알려진 기병연대와 가노(加納)대좌 등은 그 이후 행적이 확인되어 독립군의 전과로 확정하기에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 측 신문 기사 내용만을 근거로 일본군 부대가 독립군에게 전멸 당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가노대좌와 같은 논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더 그 사실 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단 단서가 너무 빈약했다. 신문에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전멸당한 일본군의 소속 등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당시 일본군 장교 중에 ‘단일’이라는 성을 가진 소위가 없어 추적은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중국 신문 기사를 면밀하게 살펴보니 전멸당한 일본군이 훈춘 주둔 부대라는 단서가 있어, 이를 실마리 삼아 일단 찾아보기로 했다.
청산리 대첩 당시 훈춘에서 한인을 탄압한 일본군은 조선 주둔 일본군 중 이소바야시 지대였다. 따라서 전멸당한 부대의 용의선상에 이소바야시 지대를 포함시켜 진위 여부를 검토했다. 일본군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간도출병사’라는 일본군 기록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 중 유일한 장교 부상자가 이소바야시 지대라고 되어있어 중국 신문 기사에서 독립군에게 전멸 당했다고 언급한 일본군이 이소바야시 지대 예하 부대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중국 신문 기사에서 일본군이 몰살당했다고 지적한 장소는 소수분자라는 곳인데, 이곳은 이소바야시 지대가 활동한 지역과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이소바야시 지대가 소수분자까지 올라와 작전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여기에 일본군은 이다 군페이(井田 君平) 소위의 부상 경위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해서, 만일 중국 신문 기사가 이소바야시 지대의 정전과 그의 부대를 의미한다면 사망자와 전멸에 대한 내용은 오보이거나 과대 포장된 기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았다. 단서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각 부대별 활동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속된 말로 ‘아니 너가 거기서 왜 나와’ 같은 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주둔 일본군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일본 관동군 예하 부대가 중국 신문 기사에서 언급한 바로 그 지역에서 애초 작전 명령서 상에도 없던 수색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한 것을 관동군 작전 일지에서 찾았다. 그 부대는 이른바 ‘안자이(安西) 지대’라고 불리었다.
원래 안자이 지대는 수색부대가 아니라, 조선 주둔 일본군과 블라디보스톡 파견군이 간도의 독립군을 탄압하는 동안 일본이 장악한 동청철도를 수비하기 위해 관동군에서 블라디보스톡 파견군에 지원토록 한 부대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11월 초 관동군은 이 부대의 지휘통제권을 원복시키고, 심지어 기병부대를 비롯해 통신부대와 의무부대까지 추가 포함시켜 대규모 수색 부대로 편성했다. 그리고 중국 신문 기사에서 언급한 바로 그 소수분자와 인근 지역을 수색하도록 했다. 수색한 시기 역시 11월 초 중반으로 신문에서 언급한 시기와 같은 시기였다.
앞뒤 상황의 퍼즐을 맞춘 사실은 이러했다.
관동군이 애초 작전 명령에도 없던 수색부대를 갑자기 편성한 것은 예하 부대가 독립군에게 전멸 당하자, 독립군을 찾아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애초 소수분자 일대를 수비하던 일본군은 인근에 독립군 700~800명이 출현했다는 보고에 무라타(村田)중위에게 정찰대를 편성해 확인토록 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오히려 독립군에게 걸려들어 전멸 당했다. 소수분자 수비대는 그제야 독립군의 전력을 실감하고, 그 다음날 중무장한 소대 병력을 파견해 시신을 겨우 수습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사태가 심각했다. 2개 대대 규모 어쩌면 그 이상의 독립군이 일본군이 만든 포위망을 돌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관동군은 이를 그냥 간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독단으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작전 명령에서 벗어나 기병부대까지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수색부대를 편성했다. 이렇게 안자이 지대를 급조했다. 하지만 안자이 지대는 20여 일간 그 일대를 수색했지만, 독립군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주둔지로 복귀했다. 2개 대대 규모, 어쩌면 그 이상의 독립군이 일본군 정찰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독립군의 승전 소식은 곧바로 중국 언론에 흘러들어갔고, 이른바 ‘독립군에게 또 다시 패배한 일본군’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신문에 실리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 신문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간의 전투상황과 그 결과 등을 파악하기 어려워 일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번 중국 기사에서도 그 이름이 잘못되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규명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 외 내용은 사실에 가까웠다.
의외로 중국 신문을 살펴보면 이러한 단서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좌중관천’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 관동군 예하 북만주 파견대의 무라타 중위와 그 정찰대를 전멸시킨 그 이름 모를 독립군처럼 이제는 독립운동의 보다 깊숙한 내용까지 살펴봐야할 때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새로운 사료를 찾아 헤매는 것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이 매일 마주하는 교과서 속의 사진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도 어쩌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