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국가가 전쟁에 단 한번 써먹기 위해 유지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평소 안보 차원에서 유지를 하기도 하지만, 군대는 기본적으로 ‘전쟁 상황’을 고려해 육성한다. 그런데 거꾸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젊은 피들을 희생시키는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떨까. 어이없지만 일제는 이런 방향을 선택했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이후 조선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일본 육군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주둔시키고자 했다.
당연히 일본 내각은 반대했다. 추가로 2개 보병 사단을 증설해 조선에 상설 주둔하는 것은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 이후 엄청난 군사비 지출로 인해 심각한 적자 재정에 직면했다. 연간 정부 예산 중에 절반에 가까운 수준으로 군사비를 지출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해군은 일찍부터 이른바 ‘88함대’ 계획을 수립하고, 신형 군함 건조에 착수했다. 해전사에서 군함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할 정도로 중요한 ‘드레드노트급’(일본식 표현으로 ‘노급’) 전함이 여러 척 포함되었다. 1910년대 후반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한 척당 건조 비용은 약 4천만엔에 달하였고, 이것은 조선총독부 전체 세출의 약 4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일본 해군은 이런 전함을 1918년까지 10척이나 건조하였다.
일본 육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육군은 전시를 대비하여 50개 사단이 필요하고, 평시에는 그 절반인 25개 사단을 상비사단으로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0년까지 일본 육군은 19개 상비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6개 사단이 부족한 상태라고 주장하였다. 일본 육군은 점차적으로 사단을 증설해야하지만, 일단 2개 사단을 추가로 신설해야한다고 일본 정부에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예산을 확보한 일본 해군과 달리 일본 육군은 추가 예산이 필요한 상태라 일본 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국가 재정은 점차 파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논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었다. 평시에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비용이 들었고, 이 비용은 그 어떤 정부라도 부담스러웠다. 특히 군이라는 존재가 오롯이 소비만을 위한 집단이기 때문에 그 규모가 커지면 유지 비용은 그에 따라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현대화’ 혹은 ‘신설’ 같은 수식어가 붙으면 그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현대화’는 쉽게 말하자면 가지고 있는 무기 대신 새로운 무기로 교체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현대화’가 단지 무기만을 바꿔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프린터를 새것으로 교체하면 그에 따른 소프트웨어부터 카트리지 같은 소모품까지 일괄 교체해야 하는 것처럼 무기 교체는 사용법 교육부터 소모품 준비까지 해야 할 것이 많았고, 이러한 교체 과정은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는 것 역시 이전과 비교해 절대 낮아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현대적 무기일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고, 복잡성의 증가는 비용의 증가와 사실상 동의어라고 할 수 있었다.
부대 신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군인만 모집해 부대를 편성하면 끝이 아니었다. 새로 모집한 부대가 주둔할 수 있는 땅을 확보해야 하고, 여기에 병영을 짓고, 모집한 군인에게 무기와 피복 등을 지급하는 등 모든 것이 추가 비용이었다. 이게 다일까? 그렇지 않다. 최소한 추가 모집 인원에 대한 인건비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속담에 ‘산 입에 거미줄 치랴’ 같은 말이 있지만, 군인은 절대 아니었다. 스스로 농사짓고 지키는 둔전병 같은 체제가 아닌 이상, 굶주린 군대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해산하여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부대 신설이란 신설한 만큼 계속 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니 일본 정부가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군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일본 정부의 반대가 국가 운영상 합당한 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본 육군도 힘으로 밀어붙일 수만은 없었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며 최고 원로 대접을 받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까지 러시아의 위협 등을 거론하며 2개 사단 신설을 주장했지만, 비용이란 벽을 넘기는 어려웠다.
결국 일본 육군은 정부를 상대로 설득과 이해를 구하는 정석을 택하는 것보다 일종의 정치적 ‘꼼수’를 선택하였다. 육군 대신이 나름 ‘비장하게’ 육군대신 직을 걸고 일왕에게 직접 청원하고, 일종의 ‘배수진’을 쳤다. 이것을 정치적 ‘꼼수’라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정식 규정도 아닌 내각 구성 정원표의 비고에 적어둔 ‘육군 대신은 현역 군인으로 한다’라는 이른바 ‘군부 대신 현역무관제’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사임한 육군 대신이 일본 육군의 주류 파벌이라고 할 수 있는 죠슈번 출신이 아닌 사쓰마번 출신의 우에하라 유사쿠라는 점도 주요하였다.
육군 대신인 우에하라 유사쿠가 증설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일본 내각은 구성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비고에 적어둔 ‘군부 대신 현역무관제’라는 것 때문에 일본 육군에서 현역 중 육군 대신을 추천하지 않는 한 내각 자체를 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우에하라의 사임으로 당시 사이온지 내각은 총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일본 육군이 내각을 붕괴시킨 것이었다. 일본 정치사에서 이것을 흔히 ‘다이쇼 정변’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이후 일본 육군이 당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는 것으로 일본 정부와 합의하에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의 이러한 정치적 꼼수는 결국 대륙 침략 전쟁이라는 자전거에 올라타는 것과 같았다. 끊임없이 패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일본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이후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전쟁을 확대하는 일본의 전초 기지이자, 후방 보급기지로 전락하였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