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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⑨] 하나의 사건, 두 가지 시선 : 프랑스에서 바라본 병인양요


입력 2020.12.29 13:00 수정 2020.12.29 14:03        데스크 (desk@dailian.co.kr)

강화도를 포격하는 프랑스군ⓒIllustrated Weekly News - Saturday 12 January 1867

1866년에 일어난 사건인 병인양요, 프랑스에서는 이를 ‘조선 원정’(L'expéditions de Corée)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해군이 주도한 ‘조선 원정’, 사실상 조선 침략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1‧2차 아편전쟁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굳건해 보이던 서구 열강의 위상은 프랑스의 ‘조선 원정’ 실패로 인해 실추된 반면 조선은 더욱 자신감에 충만하여 강경한 대외 정책 노선을 취했다. 프랑스의 원정 실패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내에서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서구인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졌고, 중국 해적이 유럽 선박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해상에서 서구 열강의 우세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조선도 프랑스를 상대해 승리하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중국에 퍼진 결과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대외 정책 문서 중에서는 로즈 제독의 조선 원정을 ‘실패’로 단정하고, 이로 인해 중국에서 실추된 프랑스의 위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묻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뼈아픈 질문을 던지며 원정의 실패가 가져올 후폭풍을 우려했다.


“3억 6000만 명의 중국인을 상대로 현지에 주둔한 소수의 프랑스 해군이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요? 이미 중국 해적은 유럽 선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자기 나라에 평화롭게 놔두십시오. 우리의 선교사들은 전교(傳敎)가 아닌 설교에 만족해야 합니다.”


프랑스 의회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해군은 원정 실패를 인정하기 이전에 우선 세계 곳곳에서 프랑스 해군이 자국민의 안전과 무역의 자유 그리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지 해군사령관이었던 로즈제독은 조선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박해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미지의 왕국이었고, 외국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 작전을 펼치기 어려웠다. 조선의 프랑스 선교사 박해 사실 역시 박해를 피해 탈출한 선교사를 통해 확인한 내용이며, 중국 정부에 사실 확인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에 로즈 제독은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조선의 해안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특히 수도인 서울로 가는 통로인 한강은 지금까지 어떤 서구 열강의 배도 들어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정찰이었다. 로즈 제독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며 정찰선을 직접 인솔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겨우 서울 어귀까지 정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탐사 결과를 토대로 로즈 제독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강화도를 점령하여 수도 서울을 봉쇄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아시아 주둔 프랑스 함대의 전력만으로는 조선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강화도를 점령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로즈 제독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애초부터 봉쇄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강화도 점령 이후 한강을 봉쇄했다고 선언한 것이 결정적인 근거라고 말했다. 절대 중국 주둔 프랑스군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로즈 제독은 한강 봉쇄 작전이 조선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작전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강화도에서 다수의 무기와 은괴 그리고 공식 기록물로 가득 찬 18개의 상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이렇게 많은 무기와 은괴 그리고 중요한 물자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한강 입구에 위치한 그 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근거였다.


다만, 그렇게 중요한 섬을 프랑스 해군이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회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군사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로즈 제독은 강화도를 점령한 이후 조선 정부에게 원정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한 편지를 보냈지만, 조선 정부에서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 정부의 답신에서 선교사를 박해한 것을 분명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고, 포로로 잡힌 조선 관리도 조선에 밀입국하여 전교한 선교사를 처벌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조선 정부의 태도는 당시 프랑스 함대에 동행한 중국인 통역사가 저속한 중국어만 알고 있어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탓으로 판단하여 로즈 제독은 능력 있는 통역사를 데려오기 위해 상하이까지 군함 한 척을 보내고 기다린 탓에 조선 정부와 회담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 정부에 협상할 수 있는 전권대사를 강화도로 파견하라고 요구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로즈 제독은 조선 정부가 협상을 빌미로 자신을 서울에 초대했지만, 사실 그것이 함정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로즈 제독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이미 한강 주변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돌을 실은 배를 한강에 가라앉혀 봉쇄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즈 제독이 조선의 요구에 응해 서울로 갈 경우 위험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강화도 점령에 조선이 심각한 위협을 느낀 결과라고 판단했다. 의회 보고에서도 로즈 제독은 절대 프랑스군이 조선군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철수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겨울철이 다가오기 때문에 한강에서 더 이상 군함을 운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조선 정부와 협상을 계속 진행하지 못하고 안타깝지만 철수했다는 것이다. 그는 강화도에서 철수하면서 각종 군사 시설을 파괴해 조선 정부가 더 이상 프랑스 국민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경고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해군 예산 감축으로 상륙할 수 있는 군인이 부족하였고, 특히 군함이 노후되어 더 이상 운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로즈 제독은 해군 예산이 충분히 확보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자국민과 무역선을 보호하고,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내에서 이른바 ‘조선 원정’에 대한 여론은 전혀 달랐다. 대부분은 로즈 제독의 이번 원정 실패에 대한 뒷감당을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며 비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해군은 이에 대해 언론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군에서는 이번 원정의 목적이 조선에서 일어난 종교 박해로부터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언론에서는 오히려 프랑스가 ‘혁명’으로 이룩한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제대로 실현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외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하였다. 사실상 당시 나폴레옹 3세의 통치가 혁명 이전으로 회귀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병인양요에 대한 프랑스의 시선에서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의 패배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에게 프랑스군이 심각한 패배를 당해 강화도에서 철수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프랑스 해군은 다가오는 겨울철에 한강과 조선 근해에서 노후 군함으로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내용이 더 많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완전한 종교적 자유’라는 명분은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 섬에서 기독교인을 탄압했지만, 이를 프랑스가 외면하면서 더 이상 명분으로 삼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의 가장 큰 고민은 이미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멕시코에서 어떻게 철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 강화도에서 철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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