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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⑫] 가진 것이 망치뿐이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입력 2021.01.19 13:00 수정 2021.01.19 12:56        데스크 (desk@dailian.co.kr)

바닷길 차지하기 위한 근대 서구 열강들의 경쟁 치열

미, 타이완 공격 실패…열강들, 내륙 진출 한계 드러내

모비딕 초판에 실려있는 삽화ⓒ위키디피아

얼마 전 미국의 한 언론사에서 ‘소설 최고의 첫 문장’으로 ‘모비딕’의 ‘Call me Ishmael’이 선정됐다. 소설 ‘모비딕’은 자신을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달라는 어느 포경선 생존자의 체험담이 주 내용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50년대 포경산업은 미국의 주요 산업 중 하나였다. 소설 속 이스마엘 역시 맨해튼에서 출발해 당시 미국 포경산업의 중심지였던 낸터킷에서 피쿼드호에 올랐다. 피쿼드호는 아프리카를 돌아 ‘일본 인근의 바다’라고 표현된 곳에서 모비딕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침몰한다. 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이스마엘이다.


동해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잡이 모습이 등장할 정도로 고래가 많은 바다였다. ‘헌종실록’에는 조선 후기 출몰하던 이양선에 대해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함경·강원 다섯 도의 대양 가운데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간혹 뭍에 내려서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라고 기술했다. 소설에서도 피쿼드호는 프랑스 포경선을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포경선과 마주쳤다. 여담으로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의 이름이 ‘스타벅’(Starbuck)인데, 커피체인점 ‘스타벅스’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피쿼드호처럼 침몰할 경우 생존자의 귀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접한 국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1855년 철종 당시 이양선 선원이 표류하다가 강원도 통천 해변에 도착했는데, 그들이 타고 있던 배도 포경선이었다. 이들은 ‘투브라더스’라는 미국 포경선에서 탈출한 이들이었지만, 조선 정부는 이들을 안전하게 청으로 보냈고, 이후 베이징의 미국 영사에게 인도됐다.


바다에는 비단 모비딕 같은 고래뿐 아니라 풍랑을 비롯해 다양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 난파되어 표류했을 때 도착한 지역이 적대적이거나 혹은 미지의 장소라면 살아서 귀환하기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 열강은 이러한 위험에 대비하여 각지에 우호적인 지역 혹은 식민지를 만들고, 주요 지점에는 안전한 항구를 마련했다. 이렇게 서구 열강이 자국 질서에 강제로 편입시킨 지역은 일종의 안전지대였고,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보험과도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이미 서구 열강이 선점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영국이 선점한 지브롤터, 싱가폴 등 주요 지역은 다른 바다로 넘어가기 위한 길목이라, 이를 통하지 않고 해상 무역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영국이 선점한 주요 지역을 ‘세계의 열쇠’라고 부르고, 이를 영국이 봉쇄하면 세계 무역이 멈출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무역량이 증가할수록 미국 상인에게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거나, 태풍 등을 피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했다. 1853년 미 페리 함대의 일본 원정(Perry Expedition)은 주요 열강이 선점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미국에서는 이를 ‘원정’(Expedition)이라고 불렀지만, 일본과 류큐왕국 입장에서는 침략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중국과 무역을 계속 확대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 미국의 대 중국 수출량을 살펴보면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 대륙의 국가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미국 상인은 광동과 상하이 등을 거점으로 무역량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면서 미 정부에 일본 이외의 중간 기착지를 요구했다.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대표적인 지역은 타이완이었다. 특히 타이완의 기륭은 항구와 증기선의 연료로 쓰이는 석탄 채굴장이 인접하여 미국과 중국 간의 중간 기착지로 삼기에 적합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상인들은 186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정부에 타이완 원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67년 로버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 정부를 상대로 대중국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다시금 재기됐다. 로버호 사건은 미국 국적의 상선 로버호가 타이완 인근 해역에서 난파되어 타이완에 표류했을 때 타이완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한명을 제외하고 몰살당한 일을 말한다. 로버호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내 미국 상인은 보다 안전한 항해를 위해 미국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미국은 남북 전쟁 이후 피해 복구에 집중하면서 대외 정책을 수행할 수단이 그다지 그리 많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청 정부에 로버호 생존자 수색과 사건 해결을 요청하였지만, 청 정부는 해당 지역의 원주민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난색을 표명했다. 자국의 영향력 밖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미국은 페리의 일본 개항처럼 군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동아시아에 주둔 중인 동인도 전대를 동원해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보복을 추진했다. 이를 추진하면서 미국 정부는 1854년 일본 개항과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동인도 전대 소속의 군함 두 척은 6월 19일 타이완 해변에 도착하여 포격과 함께 매켄지 중위 지휘 하에 181명의 해병대를 해안에 상륙시켰다. 매켄지 중위 부대는 로버호의 생존자 수색과 보복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륙으로 수색 범위를 넓히면서 원주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매켄지 중위 부대는 정글의 더운 날씨 속에서 제대로 운신하기조차 어려웠고, 지형을 이용한 원주민의 공격에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부대를 지휘하던 매켄지 중위마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 결국 해변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미 해병대의 공격이라는 카드가 실패로 끝나면서 더 이상 미국 정부가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미국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로버호 사건은 중국 주재 미 영사가 중국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하여 원주민에 대한 협상을 요구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애초 원주민은 해안에 상륙한 서양인이 자신들을 공격해 살해하자, 그 이후 서양인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응하게 되었고 로버호 선원들도 같은 맥락에서 대응한 것이었다. 미 영사의 무력시위를 동반한 협상에 원주민이 호응하면서 로버호 사건은 마무리됐다.


여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있었다.


미국 등 서구 열강은 이른바 해군력을 기반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륙으로 진출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지역민은 지형의 이점과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의 군대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현지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 열강의 군대는 미해병대처럼 정글의 날씨 등에 쉽사리 적응하기 어려웠다.


충돌이 장기화될 경우 풍토병이 발병할 수도 있었다. 실제 일본이 류큐인의 표류 문제를 빌미로 타이완을 침략했을 때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풍토병에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 정부는 전쟁이라는 마지막 해결책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겼다. 로버호 사건의 교훈은 사라지고 다시 보복과 이를 위한 전쟁만이 남았다. 그 결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미국에 알려졌을 때 미 정부는 보복을 위해 강화도를 침략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에 계속)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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