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가진 것이 망치뿐이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에 이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흔히 개신교 선교사를 위한 묘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개신교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한말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다 사망한 외국인 중 많은 이들이 여기에 묻혔다. 그 중에는 르 장드르(Charles William Le Gendre, 한국명 이선득(李善得))도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대학을 졸업했지만,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지원해 전쟁에 참가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고 퇴역했다. 퇴역 당시 계급은 대령이었지만, 전공을 인정받아 명예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중국 하문에 영사로 취임했다.
르 장드르는 중국에 도착한 이후 ‘중국인 계약 노예’ 즉, ‘쿨리’의 불법적인 미국 이주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67년 미국이 ‘로버 호 사건’(Rover incident)을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지만 실패하면서였다. 르 장드르는 타이완 원주민을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고, 이들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르 장드르는 대규모 중국인 용병을 동원해 무력시위를 하면서 협상을 요구하긴 했지만, 결국 원주민과의 협상을 실현시켜 타이완 원주민으로부터 미 상선의 안전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국가만이 국제관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당시 특성을 고려한다면 르 장드르와 타이완 원주민 간의 협상과 그 결과는 미국이 타이완 원주민이 사는 지역에 대한 권리를 일부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을 살펴보면 주로 다른 열강의 식민지를 매입하거나, 군사적 수단에 의존했다. 흔히 미국의 서부 개척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텍사스 등 미국 서부지역 상당 부분은 미 독립 당시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1810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멕시코의 영토가 됐다. 그 직전에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면서 멕시코는 미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이전부터 산타페 가도와 캘리포니아 가도 등을 따라 많은 미국인이 서부로 이주했고, 멕시코가 독립한 이후에도 미국인의 이주는 계속됐다. 일부 미국인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역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했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텍사스 등에는 미국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했다.
텍사스에 정착한 이들은 이곳에서 노예를 이용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멕시코 정부가 노예 제도를 금지하자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켜 텍사스 공화국을 수립했다. 영화 ‘알라모(The Alamo)’(1960)는 이 때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텍사스 공화국은 1845년 미국 연방에 병합을 요청했고, 이를 멕시코가 반대하면서 미국과 멕시코 간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미국은 매입이 안될 경우 수단이 망치뿐인 것처럼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체결하고, 이때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미국에 영토를 할양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된 것은 조약 체결 직전인 그해 1월 24일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독립 당시부터 채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영토가 몇 배로 확장되어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접하게 됐다.
이러한 미국의 서부 진출 역사는 전형적인 서구 중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이곳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던 멕시코와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그 지역은 이전부터 수많은 원주민이 살던 터전이었다. 비록 이들이 국가를 수립하여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날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인이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그곳을 ‘탐험’한 이후 주인이 없는 땅 이른바 ‘무주지’(無主地)로 인식하고,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서구 중심으로 영토를 인식한 결과이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에서도 동일한 행보를 걸었다.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가 그러했다.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 스페인은 이 지역을 하나의 식민지로 묶어 지배했다. 필리핀이라는 국호 자체가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강화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병인양요는 서구 열강에게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조선의 영토로 각인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Port Hamilton’이라 부르며 무단 점령한 사건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조선은 영국을 상대로 거문도는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영국은 거문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면서 임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조선이 거부하면서 2년여 만에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르 장드르는 타이완 원주민과 협상 이후 ‘청국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How to deal with China)(1871) 등을 저술하며 중국 전문가로 부상했다. 이후 그는 일본의 타이완 침략에 대한 외교 고문으로 초빙되어 활약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75년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이때 르 장드르는 일본이 타이완과 조선을 영향력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후 일본의 대외 정책의 주요 줄기가 됐다. 르 장드르가 타이완 원주민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동반한 협상 방식은 이후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대외 침략 과정에 그대로 반영됐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등 뒤의 방망이’(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로 알려진 대외 협상 정책 이전까지 여전히 망치든 소년처럼 모든 것을 군사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접근 과정에서도 수단이 망치뿐인 것처럼 접근하였고, 그 결과가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여담으로 르 장드르는 우리나라에서도 활약했다. 1890년 2월 고종이 그를 통리군국사무아문의 협판으로 임명하면서 조선에 건너왔다. 르 장드르는 조선에서 차관 교섭과 어업권 협상 등에 관여했고, 청일전쟁 이후에도 계속 조선에서 활동했다. 르 장드르는 1899년 9월 1일 조선에서 사망해 조선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