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강한 국방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모색’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남과 북, 국제사회가 대화와 신뢰를 통해 장애를 뛰어넘고, 한반도부터 동북아로 평화’를 넓혀가겠다고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국방 예산안을 편성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에서 주권자인 국민에게 대통령이 예산안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19세기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1871년 12월 4일 미 그랜트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 의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시정연설을 했다. 여기서 그랜트 대통령은 그해 여름에 군대를 조선에 파병한 이유와 경과 그리고 결과 등을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 선박의 안전을 위해서였다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풍랑 등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난파한 미국 선박, 선원의 구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연설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 의회에 보낸 자료에서는 1866년 제너럴 셔먼 호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미국 선박이 조선 인근 해역에서 조난당하여 표착할 경우 살아남은 선원은 야만적 대우(barbarous treatment)를 받기 때문에 파병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은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선원들이 조선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법 침입해, 통상을 강요하고, 선교 등을 이유로 많은 양민을 죽인 결과 야기된 사건이었다. 그 직전에 일어난 서프라이즈 호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의도적으로 서구와 거리두기를 하며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거리두기는 조난당한 선원의 입장에서는 안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멀리서 이를 바라보는 입장 특히 위험을 관리하는 ‘보험’이라는 입장에서는 불안전한 것이었다. 조난 선원의 안전이 전적으로 조선에 달려있다는 것은 위험을 관리하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불확실성이었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당연히 경제적 비용과 정치적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하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미 정부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라는 안전망이 필요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이런 이유로 먼저 중국 주재 공사에게 난파된 선원의 안전(safety)과 인도적 대우(Humane treatment)를 골자로 한 협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협약 체결은 단순한 요청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가 미국 정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할 강제력이 필요했다. 어쩌면 조선 정부의 위정자가 군함의 대포소리를 듣게 되면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는 일본에서 막부를 상대로 이를 적용한 경험이 있었고, 조선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조선 정부가 중국 주재 미국 공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충분한 힘을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미 해군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아시아 함대에 군함을 증원했다.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4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9년 미국을 출발해 지구 반대편의 일본으로 향했다. 4척의 군함이 도착하자 로즈 제독은 조선에 미국과 통상 수교를 강요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의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예상과 달리 조선은 측량 중이던 소규모 함대를 기습했고, 비겁한 공격으로 미 함대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해명과 사과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부여했다. 하지만 끝까지 조선 정부에서는 어떠한 답변도 없었다. 이에 로즈 제독은 미국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력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을 비겁하게 공격한 강화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응징하고자 했다. 그랜트 대통령은 상륙한 미군이 갖은 난관을 극복하고 미 함대를 공격한 요새를 파괴하여 미국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전투 경과를 설명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미군은 철수했다. 이것이 그랜트 대통령이 설명한 1871년 미국의 조선 파병 이유와 경과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 의회 차원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랜트 대통령의 연설 내용은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조선과 통상 수교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의회에서 예산안을 동의해 주어야 했다. 개별 전투에서 승리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으면 더 많은 예산을 의회에서 승인해 주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그랜트 대통령의 의회 연설은 1871년 미 함대의 조선 원정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잘 보여준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감축된 군사비를 다시 증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으서는 동북아시아 3국 중 조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예산 관련 연설은 1890년 일본에서도 재연됐다. 당시 총리로 취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2월 의회에서 이와 관련한 연설을 했다. 이때 일본의 대외 정책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내용은 ‘이익선’과 ‘주권선’에 대한 것이었다. 야마시타는 일본 영토를 주권선으로 설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확장된 이익선이라는 것을 설정하여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주권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적 영향력을 이익선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야마가타는 그 이익선이 ‘조선’에 있다고 했다. 조선을 일본의 안전을 위한 울타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주권을 도외시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야마가타의 주장은 1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다. 2020년 일본 총리로 취임한 스가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첫 국외 방문지가 호주였던 이유는 이전 아베 신조 내각이 추진하던 ‘인도 태평양 방위 전략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미국 바이든 당선자와의 첫 전화 회담에서도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의 권리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나아가 인도 태평양 방위 전략 하에서 일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국 이익을 중심으로 한 150여년 전 그랜트 대통령의 시정연설과 130여년 전 야마가타의 연설 배경에는 한반도를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 여기는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최근 일본의 주장을 보면 그러한 인식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이런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