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예방 접종이 시작됐다.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미국 등의 사례를 근거로 살펴보면 어느 정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방(豫防)이란, ‘예상되는 악화에 미리 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방 접종을 통해 ‘감염 확산’이라는 악화에 대비할 수 있는 효과가 조속히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과거 감염병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에 위협적인 요소를 꼽자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풍토병, 특히 말라리아였다. 이 때문에 서구 열강은 아프리카를 지나 아시아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특히, 시에라리온 일대를 ‘백인 남자의 무덤’(white man's grave)이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범선을 타고 남아프리카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적도 인근의 시에라리온을 비롯해 서아프리카 일대를 지나야 하는데, 이 지역은 높은 온도와 무더운 기후 그리고 서양인에게 적대적인 부족, 늪지대, 떼 지어 다니는 벌레들, 온갖 수목들이 뒤엉킨 정글이 펼쳐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많은 선원이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당시 선원은 대부분 남자였기 때문에 ‘백인 남자의 무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열대 국가의 기후에 대한 ‘검은 전설’(black legend)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해안은 ‘불타는 용광로’(a blazing furnace)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유럽인이 경험해 본 적 없는 뜨거운 날씨였다. 여기에 높은 습도는 열대 우림과 함께 모기가 번식하기에 적합했다. 아프리카 원주민은 이러한 환경에서 오랜 기간 살아오면서 모기를 매개로 한 주요 질병인, 말라리아, 황열병 등에 면역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유럽인은 그렇지 않았다.
노예 무역이 횡행하던 시절, 황열병의 매개체인 숲모기는 흑인 노예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흑인 노예가 자유를 구속당하며 삶의 반경이 한정되었던 것과 달리 숲모기는 기후가 허용하는 범위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흑인 노예가 아니라 이들을 데리고 온 백인이 황열병 등에 감염된 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이었다. 어떤 경우 선원의 3분의 1정도가 황열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렇게 선원을 통해 황열병은 급속하게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급격히 퍼졌다.
아프리카 숲모기는 미국 토종 모기를 압도하면서 미국을 넘어 캐나다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고, 남으로는 멕시코를 거쳐 남미까지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숲모기는 스페인의 착취에 겨우 살아남았던 마야족 생존자들에게 또 다른 재앙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흑토병’, ‘샤프란의 재앙’이라 불리며 아메리카 대륙은 황열병 등에 휩싸였다. 사실상 노예제가 가져온 결과였다.
한편, 19세기 중엽 일본이 팽창정책을 펼치던 아시아에서는 그 반대 상황이 일어났다.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1872년 무단으로 류큐 왕국을 자국령으로 선언했다. 이른바 ‘제1차 류큐처분’이다. 당시 류큐 왕국은 이러한 일본의 선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발했는데, 서구 열강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특히 류큐 왕국은 청에 계속 조공을 하면서 청의 속령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주장은 국제 사회에서 당위성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은 그 이전에 일어난 ‘모란사 사건’을 빌미로 타이완에 출병했다.
‘모란사 사건’이란, 1871년 12월 류큐 왕국의 선박이 타이완 인근 해역에서 조난당한 이후 타이완에 상륙한 선원 일부를 타이완 원주민이 살해한 사건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에 대해 1871년 9월 체결한 ‘청일수호조약’을 근거로 청에 항의하면서 관련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청은 일본의 요구에 대해 타이완 원주민의 경우 ‘화외 백성’(化外之民)이기에 처벌할 수 없다는 형태로 거절했다. 청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생번(生番), 즉 타이완 원주민은 우리 인민 이외의 사람들이니, 그들의 죄를 묻고 말고는, 귀국이 판단하고 결정하라’(生番係我化外之民,問罪與否,聽憑貴國辦理.)고 답변한 것이다.
청 정부의 답변에 일본은 타이완을 ‘중국 밖의 땅’(化外之地)으로 해석하여 국제법상 일종의 무주지로 판단했다. 특히 일본은 이전 타이완 원주민과 협상을 한 경험이 있던 중국 주재 미국 영사, 르 장드르에게 자문한 결과 일본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찬성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류큐인을 자국민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자국민 살해에 대한 보복을 이유로 1874년 대규모 군대를 타이완에 파병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해석과 행위는 타당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조치는 당시 국제법적으로도 성립하기 어려웠다. 우선 일본 정부가 근거로 내세운 ‘청일수호조약’은 그 무렵 일본에서 비준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직 실효성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 측에서 이 조약을 근거로 삼은 것은 국제법상 문제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영토 밖의 땅’으로 해석한 것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본의 조치는 향후 일본이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사례를 남겼다.
일본은 약 3300여 명을 타이완에 상륙시켜 원주민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약 1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약 50배에 달하는 561명이 말라리아 등으로 병사해 전체 사상자 규모는 약 600여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전체 파병 인원의 18%에 달하는 규모였다. 타이완에 상륙한 일본군은 전투 피해보다 풍토병 등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던 것이다. 사실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영국의 중재로 일본은 그해 말에 철수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청은 류큐민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면서 류큐에 대한 종주권을 사실상 포기했다. 일본이 류큐를 복속하게 된 것은 그 결과 일어난 일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대외 침략 전쟁은 처음부터 일본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자국의 섬을 벗어난 경험이 거의 전무한 일본인들이 군사적 목적만으로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주변국뿐만 아니라 전쟁에 동원된 일본인 역시 사지로 몰아넣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이 아프리카를 극복하기 위해 수백 년간 노력하면서도 19세기 말까지 극복하지 못한 것을 일본은 단 몇 년 만에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샤프란의 예언’과 같이 그들은 1920년대 초까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의 풍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세균성 이질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과 일본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질 등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도시의 일본인 사망률은 조선인의 5배에 달했다. 일본인이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균성 이질을 비롯해 한국의 풍토를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했다. 이른바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라고 부르던 것 중에 대표적인 상하수도 사업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추진되었다.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