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조차 무서워했던 사람 [정명섭의 실록읽기⑮]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7.22 14:01  수정 2025.07.22 14:01

조선의 세 번째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진짜 킬방원이라는 별명답게 왕권을 사수하는데 걸리적거리는 세력들은 모조리 쳐냈다. 자기를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에 공로를 세운 공신들은 물론이고, 헌신적으로 도와준 든든한 처가집도 장인 민제가 죽자마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이후에는 사돈도 저세상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종에게 양위한 이후에도 병권을 장악했고, 여기에 도전한 병조판서도 처참하게 죽였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이방원조차 피하고 겁냈던 사람이 있었다.


전주사고 전시관 안 실록청 모형 ⓒ직접 촬영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서기 1404년 2월 8일자 태종실록의 기사다. 말이라고는 제주도 성산일출봉 아래에서 조랑말을 탄 게 전부였지만 그때도 떨어질까 봐 꼭 매달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더 빨리 달리던 말에서 떨어졌으니 아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축해준 신하들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 괜찮다거나 어디가 아프다는 말이 아니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도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세상 무서울 거 없던 태종을 떨게 만든 사관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사관은 역사서의 편찬을 맡은 관리를 뜻한다. 법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속기사와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지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전해지지는 않지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모두 자국의 역사를 편찬했다. 고려 역시 역사서를 편찬하고 보관하는 전담 관청이 존재했다. 조선 역시 실록을 편찬했으며 젊고 유능한 관리들을 사관으로 임명해서 왕과 대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면서 기록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작성된 기록 들을 토대로 실록이 만들어졌으며, 완성된 실록은 설사 임금이라고 해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태종 이방원이 말에서 굴러떨어진 후에 주변을 돌아보며 사관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없다고 판단하자 입단속을 시킨 것이다. 불행하게도 태종 이방원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사관이 몰래 따라왔든지 아니면 현장에 있던 누군가가 슬쩍 알려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좌우로 돌아봤다는 상세한 기록까지 남겨놨다.


태종 이방원과 사관의 악연은 즉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태종 이방원이 측근들과 함께 마이천 남쪽에서 매사냥을 하고 천막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따라온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환관을 시켜서 왜 따라왔느냐고 묻자 사관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민인생은 얼마 후에 편전을 기웃거리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태종 이방원은 사관이 왜 여기까지 들어왔느냐고 하면서 편전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태종 이방원의 성격을 감안하면 사실상 애원한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민인생은 사관이 임금 곁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태종 이방원이 대답한다.


민인생에게 말하기를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똑바로 쓸 마음이 있으면 대궐 밖에서라도 내 말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고 농담 섞인 비아냥에 민인생은 내 뒤에 하늘이 있다는 대답을 한다. 장담하지만 이 대답을 듣는 순간 태종 이방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을 것이다. 위에 나오는 사냥 관련 기사 역시 민인생이 현장에 따라가서 직접 봤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태종에게 반박해서 찍힌 민인생은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갔다가 파직당하는 등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쪽 같은 성격과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왕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애를 썼다.


요즘은 종종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헬조선’이라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기록을 남겨놓는 것에서만큼은 우리는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다. 민인생을 귀양 보내는 뒤끝을 부렸던 태종 이방원 조차 편전에 사관들이 들어와야 한다는 요청을 끝끝내 거부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기록하려는 사관과 감추려는 임금의 숨바꼭질 아닌 숨바꼭질은 계속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사관의 직책을 맡은 관리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우리는 비교적 공정하면서도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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