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침묵" 국제 영화계 반발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심사위원장 빔 벤더스 감독의 발언으로 거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개막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공습과 관련한 질문을 받은 그는 "영화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며 "영화 제작은 정치의 반대말"에 가깝다고 선을 그었다.
ⓒ뉴시스/AP
이 발언은 즉각 국제 영화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베를린영화제가 오랜 시간 구축해온 정체성에 깊은 균열을 냈다. 과거 이란의 인권 탄압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선명한 연대 메시지를 내왔던 전례와 비교되면서, 이번 태도는 중립이 아닌 '선택적 침묵'이라는 비판으로 번지고 있다.
베를린영화제는 칸이나 베니스에 비해 사회·정치적 의제를 비교적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제로 평가를 받는다. 이런 성격은 영화제의 탄생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951년 서베를린에서 출범한 베를리날레는 냉전 초기 미군정 지원 아래 시작됐으며, 서방 문화를 알리는 창구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할리우드 중심의 비교적 온건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됐고, 정치적 색채가 본격적으로 강화된 것은 1960~70년대 68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다. 분단 도시 베를린이라는 지역적 맥락, 그리고 독일이 짊어진 홀로코스트와 전쟁의 역사는 이 영화제가 인권·민주주의 같은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적 토양이 됐다.
실제로 2022년 2월엔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영화제의 입장'이란 제목의 성명을 냈다. 2023년 개막식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규탄하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연결하고. 이란 정부의 탄압으로 참석하지 못한 감독들의 공개 서한을 공식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2011년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정부 탄압으로 불참했을 때 그의 자리를 빈 의자로 남겨두며 연대했다.
이런 흐름은 2024년 제74회에서도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작가를 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곰상을 '다호메이'에게 수여했다. '다호메이'는 프랑스의 다호메이 왕국 식민 지배와 문화재 약탈·반환을 기록한 작품으로, 프랑스와 역사적 공범 관계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 과거를 간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선택이라는 평이다. 이처럼 과거의 식민 지배와 타국의 분쟁에는 서슴없이 메스를 들이대던 영화제가, 현재 진행형인 가자지구의 비극 앞에서만 유독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영화제가 스스로 세워온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논란은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틸다 스윈턴, 하비에르 바르뎀, 마크 러팔로, 켄 로치, 아담 맥케이, 마이크 리, 미겔 고미쉬,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프로듀서 제임스 윌슨 등 90여 명의 전·현직 참가자들은 집행위원회에 공개서한을 보내 가자 분쟁에 대한 침묵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들은 서한을 통해 베를린영화제가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을 억압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계속 가해지는 끔찍한 폭력에 영화 산업 관련 기관들이 공모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과거 이란과 우크라이나 문제에는 명확한 입장을 밝혔던 것과 달리 유독 팔레스타인 문제에만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중잣대를 정면으로 지적한 셈이다.
비판이 거세지자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은 "광범위한 논쟁에 대해 언급하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며 빔 벤더스를 두둔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논란을 잠재우기보다 오히려 불씨를 키웠다. 영화제 수장의 발언을 조직 차원에서 옹호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국제 영화계 안에서도 독자적인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위한 영화인들'이 주도하는 서약 운동에는 에마 스톤, 앤드루 가필드 등 정상급 배우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등 5000여 명의 영화인이 이스라엘 영화 기관 및 단체와의 협력을 거부하는 서약에 동참했다.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DFA)가 이스라엘 정부 지원 기관의 참여를 배제하기로 한 것을 비롯해, 블랙스타 영화제와 겐트 영화제 등이 문화적 보이콧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베를린의 행보와 대조를 이뤘다.
영화제의 소극적 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재정 구조로도 향한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주요 무기 수출국이며, 베를린영화제는 전체 예산의 약 40%를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일각에서는 이런 구조가 영화제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각을 제기하기도 한다.
윤리적 일관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지만, 한 번 흔들리면 쉽게 회복되지도 않는다. 선택적 침묵이 불러온 균열 속에서, 베를린영화제가 스스로 세워온 가치와 정체성을 지켜낼 의지가 있는지 세계 영화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영화제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도덕적 권위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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