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2')에 출연한 배우 수현. ⓒ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던 당찬 소녀가 있었다. 국제 변호사를 꿈꾸기도 했고, 대학교 땐 영자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비록 눈에 띄진 않았지만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서 확신했다. "이런 기회들이 우연은 아니야. 내가 갈 길은 배우야."
이후 영화 오디션에서 '덜컥' 합격했고 이젠 누구나 꿈꾸는 할리우드에서 '마블의 신데렐라'가 됐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2')의 수현(본명 김수현) 이야기다.
지난해 초 '어벤져스2'의 수현 캐스팅설이 온라인을 강타했을 때 대중은 "수현이 누구냐?"며 포털 사이트에 수현을 검색했다. "동명이인 남자 배우와 유명 작가는 들어봤는데, 여자 배우 수현은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관련 기사는 세기 힘들 정도고, 많은 팬이 생겼다.
영화는 개봉 11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몰이 중이다. 누구보다 기쁠 수현을 지난달 29일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명문대 출신 '엄친딸'에서 배우가 되기까지 수현은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가 연기 경력 10년 차라는 사실을 아는 대중은 별로 없다. 마냥 신인인 줄만 아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수현은 2005년 한중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 '게임의 여왕'(2006), '도망자 플랜비'(2010), '브레인'(2011), '7급 공무원'(2013) 등에 출연해 필모그래피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단단한 내공이 쌓여서일까. 영화 성공 덕에 쏟아진 폭발적인 인기와 관심이 부담스러울 법한데 그는 너무나 덤덤했고, 또 차분했다.
"'스타덤에 올랐다'는 얘기나 인기는 신경 안 써요. 부담스럽지도 않고요. 다만 '수현'이라는 이름을 알린 건 기쁘고 제 이름이 대중에게 익숙해져서 좋아요(웃음)."
수현은 극 중 어벤져스 군단을 도와주는 천재 과학자 닥터 헬렌 조 역을 맡았다. 극 초반과 후반부에 등장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연기력 또한 자연스러웠다. 분량은 10분 남짓했지만, 할리우드 데뷔작에서 뽐낸 존재감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한국어 대사는 그가 직접 썼다. 한국인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출중한 영어 실력은 5세 때부터 6년간 미국에서 산 경험 덕분이다. 여기에 이화여대 국제학부를 졸업한 '스펙'도 갖췄다. '엄친딸'도 이런 '엄친딸'이 없다. 공부를 계속했을 법도 한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트'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제 목소리를 내는 직업으로 막연하게 미디어 분야를 떠올렸어요. 여러 경험을 하다 드라마를 찍기 시작했어요. 국내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다짐했죠. 제게 주어진 기회들이 필연이라고 생각했어요."
할리우드 진출은 같은 소속사 식구인 다니엘 헤니가 미국 오디션에 도전하는 걸 보고 '해보자'는 생각에 준비하게 됐다. "국내 작품을 잘한 다음에 여러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제의가 들어온 국내 작품 캐릭터가 비슷비슷해서 다른 걸 찾고 있었어요. 헤니를 지켜보면서 저도 해외 작품 오디션에 눈을 돌렸죠. 이름을 알리는 거에 초점을 맞추고 비중, 캐릭터 등에 상관없이 임했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2')에 출연한 배우 수현. ⓒ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유명하지 않지만 조스 웨던 감독 믿음으로 캐스팅 '분노의 질주7' 오디션을 볼 즈음 기회가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줄은. 오디션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마블 스튜디오는 철통 보안으로 유명하다. 영화와 캐릭터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제 추측과 생각만으로 연기한 영상을 비디오로 찍어서 미국으로 보냈어요. 이후 캐스팅 디렉터를 만났을 때 마블이란 걸 알게 됐죠. 그리고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마지막 오디션을 봤어요. 그때 조스 웨던 감독님이 '어벤져스'라고 알려줬고요."
수현이 맡은 헬렌 조는 그간 아시아 배우들이 맡아온 강인한 전사 캐릭터와는 다르다. 똑똑한 박사 역이라 의미가 있다. "감독님이 겉으론 연약해 보이지만 속은 강한 듯한 제 모습을 눈여겨보신 것 같아요. 물론 영어도 캐스팅에 한몫했고요. 유명하지 않은 절 선택해준 감독님께 감사해요."
수현은 마블에 입성한 한국 배우로서 큰 부담감은 없었다고 했다. "감독님이 리액션을 잘 해주셨어요. 좋은 부분은 칭찬해주셨고,'이렇게 해봐라' 코치해주셨죠. 감독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번스, 스칼렛 요한슨, 마크 러팔로 등 대스타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고민했다.
"만나서 친해질 시간이 없었어요. 이미 친해진 배우들 틈에 제가 껴서 낯설어질까 봐 걱정했어요. 근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다들 잘해주셨어요. 텃새, 질투도 없었죠. '닥터 조가 누군지 궁금했다'고 반겨줬답니다(웃음)."
한국과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캐스팅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주로 인기 스타들을 캐스팅하는 반면 할리우드는 개인의 인지도나 유명세를 철저히 배제한 채 캐스팅한다고. 프라이버시도 철저히 존중해준다. 배우들의 건강, 컨디션을 배려해주는 것도 할리우드만의 장점이라고 했다.
'아 역시 할리우드는 다르구나'라고 느꼈던 점을 묻자 수현은 "공주 대접을 받았다"며 얼굴이 환해졌다. "운전 기사까지 배우들의 성격과 맞는 분들로 신경 써줘요. 식성도 미리 조사해서 못 먹는 음식을 빼주곤 하죠. 가족과 여행 다니는 배우들은 숙소를 아파트에 마련해주고, 저같이 혼자 있는 배우들은 호텔에 숙소를 내줬어요. 서로 마주치면 불편하니까 숙소 위치도 다르게 해줬고요. 이런 배려 덕분일까요? 현장에서 얼굴 찡그리는 사람이 없어요(웃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2')에 출연한 배우 수현. ⓒ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김윤진 선배 존경…한국인으로서 자부심 느껴 '어벤져스2'로 어엿한 '마블의 신데렐라'가 된 그에겐 '제2의 김윤진'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는다. 김윤진은 2004년부터 7년 동안 미국 드라마 '로스트' 시리즈로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났다. 미국 데뷔 초 신인이었던 그는 이젠 미국 드라마계에서 굳건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수현 역시 '어벤져스2' 외에 미국 드라마 '마르크폴로'에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시즌1 방영은 끝났고 시즌2에 출연한다.
"윤진 선배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해외 오디션을 볼 때 '배우로서 한없이 무너진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윤진 선배는 이런 과정을 수차례 겪고 성공하신 거잖아요. 그것도 혼자서 모든 역경을 뚫고 배역을 꿰찬 거라 놀라워요. 특히 해외 배우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는 캐릭터를 맡은 건 정말 본받을 점이죠. 닮고 싶은 배우라서 '제2의 김윤진'이라는 수식어가 맘에 들어요."
수현은 당분간 '마르크폴로 시즌2' 촬영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후 다양한 작품 속, 매번 다른 캐릭터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어벤져스2' 배우들은 인디 영화들부터 블록버스터를 넘나들며 활동해요. 저도 이들처럼 풍부한 경험을 쌓고 싶죠. 사람들이 저를 보면 신선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게끔 발전할 거예요. 어쩌면 제가 해외 활동의 물꼬를 튼 건데 이 기회를 잘 활용하고 싶어요. 작품 활동에 대한 갈증을 느끼거든요.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돼 있는데 그걸 깨고 싶죠."
한국 사람으로 '어벤져스2'에 출연하면서 느낀 점을 묻자 "'나는 한국인이야'라는 자부심이 강해졌다"고 힘주어 말했다. "미국에 살았을 땐 미국인이라고 생각해서 귀국한 후 문화충격을 느꼈어요. 지금도 정체성 혼란이 오는데 미국에 가면 항상 '난 한국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교포가 아니라 '토종 한국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어벤져스2' 결과물에 만족하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백퍼센트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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