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걸어도 되는 배우가 있다는 건 관객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기대를 걸었는데 적어도 실망은 돌려주지 않는 배우, 유아인이 안정감 있게 성장했다. 이미 7년 전부터,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조선왕 이순, 사랑에 살다’로 느껴질 만큼 한 작품을 책임지는 호흡을 보여줬는데,. 영화는 ‘버닝’(2018) 이후부터다. 김윤석(‘완득이’), 황정민(‘베테랑’), 송강호(‘사도’) 등 에너지 넘치는 선배들에게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하거나 이미 지니고 있던 자신의 에너지와 시너지를 일으키던 유아인이 ‘버닝’에서는 전종서, 스티븐 연을 품는 모습을 보였고 이번 ‘#살아있다’에서는 보기 좋은 원맨쇼를 펼친다.
‘#살아있다’(감독 조일형)에서의 원맨쇼란 함께 주연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 박신혜의 공을 과소평가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미 좀비가 창궐한 이후 시작한 영화, 아파트 건너 동에 생존해 있는 김유빈(박신혜 분)과 오준우(유아인 분)가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한 호흡인 듯 합이 가능했던 건 먼저 촬영을 끝낸 유아인의 파동에 맞춰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탄 박신혜의 영민함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원맨쇼라는 표현을 쓴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영화가 시작된 후 박신혜가 인상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유아인은 모노드라마처럼 관객의 눈을 집중시킨다. 본래 흡인력이 좋은 배우지만, 유아인의 표현처럼 평범한 이웃집 청년 준우가 맞닥뜨린 믿기 어려운 현실이 그에게 가져온 공포와 두려움, 그것에 대한 반발로 발현되는 생존 본능과 다부진 행동력으로 반 시간 정도를 다이내믹하게 채운다. 마치 가족 없이 ‘나 홀로 집에’서 집에 남게 된 케빈이 청년이 되어 원인 모를 좀비가 내가 사는 아파트를 뒤덮은, 덤앤더머 도둑들보다 더 센 상대를 만나 고군분투하는 듯한 모습을 볼 맛 나게 연기했다.
유아인은 15일 열린 언론시사회 뒤 간담회에서 참고한 작품을 묻자 “워낙 좀비영화를 좋아해서 안 본 것 없이 많이 봤지만, 코미디영화 ‘좀비랜드’(어쩐지 콜럼버스 역의 제시 아이젠버그)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살아있다’를 보면서 ‘좀비랜드: 더블 탭’ 생각은 못했지만, 코미디영화 결이어서 케빈이 연상됐는지도 모르겠다. 유아인의 의도가 정확하게 관객 마음에 배달됐다는 얘기다.
코미디영화를 레퍼런스로 삼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유아인이 조일형 감독이 허락한 표현의 자유 아래 빚어낸 오준우라는 청년은 극한상황 속에서도 매우 귀엽다. 영화 한 편을 오롯이 책임지는 배우로 성장한 유아인이 보여 주는 모습이 무게감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17년 전 데뷔작 ‘성장드라마 반올림#’ 시즌1에서 유아인 역을 연기한 유아인의 모습과 닿아 있다는 점이 반갑다. 드라마 ‘성장드라마 반올림#’ 1편의 그 풋풋한 소년이 성장해서 영화 ‘#살아있다’의 준우가 됐다. 단순히 초심을 잃지 않거나 세월을 비낀 듯 늙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17년 시간 속에 데뷔작에서 보여 준 배우로서의 장점 ‘사람의 눈을 집중시키는 힘’을 잃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성장을 동반하면서 생생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쉽지 않은 만큼 관객인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 크다는 것이다.
그 성장에 영화 ‘버닝’에서 종수를 연기한 경험, 영화에 삶의 문학을 펼쳐내는 이창동 감독의 디렉팅에 연마된 과정이 큰 몫을 했다는 게 ‘#살아있다’의 준우에게서 보인다. 2년 전 프랑스 칸에서 유아인을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맥락의 말을 했다.
“그동안 연기를 하면 많은 경우 도레미의 ‘미’를 연기하면, 이번엔 ‘솔’, 다시 한번 ‘시’까지 가능할까? 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연기하는 기계’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연기하지 말아라,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말아라, 걷어 내라는 요구만 하셨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시 기성의 판으로 돌아간다면 그간 해왔던 다단계의 표현을 하지 않겠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곳에 또 그곳대로의 룰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조금은 달라진 연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 유아인도 배우 유아인에게 그 부분이 기대된다.”
예의, 우리가 배우 유아인에게 기대하는 ‘초마다 달라지는 다단계 연주’ 같은 변화무쌍한 연기는 ‘#살아있다’에 그대로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준우가 된 종수가 색깔을 덧입혔다. “일부러 뭘 자꾸 하지 마라, 우리 옆을 살아가는 종수가 그렇게 걷고 그렇게 말하겠니”라던 이창동 감독의 말을 잊지 않고 옆집에 사는 준우, 게임 좋아하고 먹을 것 없으니 장 봐다 두라는 엄마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겁도 많지만 ‘사람의 정’도 많은 청년을 우리 앞에 세워 놓았다.
기왕 표현이 풍성한 유아인이고 뽐내는 것조차 사랑스러운 배우라면, 극도의 기교를 자랑하는 연주로 후대 바이올리니스트의 숱한 좌절을 가져온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니콜로 파가니니의 위업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서른 즈음에 2018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배우 12인’에 들었던 그가 평생 목표로 원대한 꿈을 품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