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세밑을 달군 짜릿한 두 인물, 두 배우
장안의 화제가 된 드라마에는 꼭 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뛰어난 연기력의 배우와 그 배우가 형상화한 매력적 캐릭터, 이야기 공백이 없거나 신선한 소재를 다룬 극본, 안정감 넘치거나 새롭게 시도한 연출, 덜 여물었어도 눈길을 사로잡는 새 얼굴, 완성도 높은 미장센과 귀를 사로잡는 OST…. 전부를 갖추진 못 해도 둘 이상은 있다.
2022년의 끝자락을 뜨겁게 달군 화제작 ‘슈룹’(연출 김형식, 극본 박바라, 제작 스튜디오드래곤·하우픽쳐스)과 ‘재벌집 막내아들’(연출 정대윤·김상호, 극본 김태희·장은재, 제작 SLL·래몽래인)에도 있다. 두 작품이 갖춘 장점들의 공통점, 그 가운데 가장 큰 미덕은 연기 잘하는 배우가 탄생시킨 길이 인구에 회자할 캐릭터다. 바로 임화령과 진양철, 배우 이성민이 매섭게 빚은 진양철과 배우 김혜수가 정성으로 표현한 임화령이다.
드라마를 이끄는 ‘일인자’로서 시청자가 작품을 계속 보게 하는 힘이 있고 혀를 내두르는 연기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선 같지만. 두 캐릭터가 보여주는 세계관과 인생관은 사뭇 다르다.
먼저 살아가는 이유. 진양철(이성민 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다. 자신이 창업해 그룹으로 일군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순양의 사훈 ‘정도경영’의 기준도 돈이다. 스스로 밝히듯 그가 사랑하는 건 가족보다 순양 자체다. 임화령(김혜수 분)을 살게 하는 존재는 자식이다. 내명부의 수장 중전이기 전에 대군들의 어머니이고, 백성을 아끼고 살피는 국모이기도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중전 자리를 거는 엄마다.
둘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화령은 셋째 아들 계성대군(유선호 분)이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여성으로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공포를 느끼지만, 자식에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가르침에 맞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눈에 맞서야 하는 고통, 남과 같지 않은 데서 오는 외로움에 공감하고 아픔을 함께한다. 숨어서 몰래 하던 일을 단 하루지만 세상 안에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를 그림으로 남겨준다. 날개가 있되 날 수 없는 새였던 계성대군은 엄마의 이해와 배려 속에 내가 남자임을 알지 못하는 타국으로 가서, 여자로서 살아간다. 낯선 풍경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여자로 선 모습에서 자유와 평온이 전해온다. 다른 자식들에게도 화령은 서두르지 않고 자식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인내와 지지 속에 기다려주는 어른이다.
진양철은 자신에게 맞서거나 대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갚아 준다. 내 가족 중에는 정치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검사 사위 최창제(김도현 분)가 정치 입문을 꿈꾼다. 딸 화영(김신록 분)도 남편의 꿈을 지원한다. 서울시장이 되고 평생 절절매던 사위가 목을 꼿꼿이 세우자 언론 인맥을 통해 거액의 선거자금을 후원받았다고 폭로한다. 장자 승계의 원칙 속에 혼외 자식을 경영에서 배제한 것도 모자라 그 넷째 윤기(김영재 분)의 막내아들, 순영가에서 가장 어린 손주 도준(송중기 분)이 순영의 불법 세습에 반기를 들자 법조 인맥을 동원해 복수한다. 사위건 손주건 예외가 없는, 짐이 곧 순영인 순영공화국의 독재자다. 혼자 잘나고 혼자 모든 걸 잘해서 가족들은 기죽어 있고, 기죽지 않았어도 그의 발아래 기어야 한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진양철, 그의 말로는 8회까지 방송된 현재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셋째는 인성. 진양철은 뛰어난 기업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버지이고 좋은 할아버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족에게 경제적 부를 주었지만, 그 혜택을 누리는 대신 모든 면에서 본인의 뜻을 따라야 한다. 기업가로서도 회사 자체를 1등으로 만드는 데 집중할 뿐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다. 국가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대의명분이 있지만, 그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직원들에게는 노조를 만들 자유도 허하지 않고 고용승계 따위는 안중에 없다.
임화령은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자애롭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서는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사람도 죽이는 대비(김해숙 분)와 겨룰 때는 ‘이에는 이’로 독하게 싸우지만, 이혼당했다는 이유로 금비녀의 값조차 제값을 받지 못하고 홀대받는 약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대비의 사주를 받아 성남대군(문상민 분)이 임금(최원영 분)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헛소문을 퍼뜨린 태소용(김가은 분)을 중궁전 궁녀로 만들어 온갖 노동을 시킬 때는 사사로운 복수로 보이지만, 아들 보검군(김민기 분)이 세자 경합에서 사퇴하자 본인 탓이라는 자책에 괴로워하는 태소용을 육체적으로 혹사해 심적 고뇌를 잊게 한 것이었다. 고단하고 적막한 궁의 일상에 활력이 되는 태소용의 선천적 밝음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지혜다.
임화령과 진양철의 가장 큰 차이는 주변에, 그 사람의 마음에 사람이 있는가이다. 진양철에게 있어 기업 경영의 바른 길(정도)은 돈이 되느냐이고, 세상의 부를 내 것으로 하는 데에는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나 가족이든 아니든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젬병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나보다 잘난 이가 없어 모든 걸 해야 하는 진양철의 인생에는 휴식이 없고, 주변에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 그의 오른팔이자 친구이자 자식으로 삼고 싶은 충신 이항재(정희태 분)만이 진양철의 곁을 지킨다.
임화령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기준은 사람이다. 악기 타는 기녀 소월(전혜원 분)이 무안대군(윤상현 분)의 딸을 안고 찾아왔을 때 이를 내치면 아기가 천민으로 살 수밖에 없고, 받아들이자니 눈 부라리는 대비에게 들켜 어미인 자신의 허점이 되어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 화령이 택한 길은 우선 세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다. 그다음 대비에게 들켜 소월과 아기만 쫓겨날 위기에서는, 왕자가 천민과 결혼하는 것이 왕실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대비의 주장에 맞서 어긋나는 게 아니라 전례가 없었을 뿐이니 첫 사례로 삼으면 된다고 설득한다. 화령은 대비의 끄나풀이었던 신 상궁(박준면 분), 적에게도 속내를 보이고 마음을 들여 결국엔 신 상궁 스스로 ‘화령의 사람’이 되게 한다. 적이었던 황귀인(옥자연 분)과 역모를 꾀한 의성군(강찬희 분)도 함께 살게 하고, 황귀인에 줄 섰던 고귀인(우정원 분)도 그의 소생 심소군(문성현 분)의 생명을 구해 감화시킨다. 이쯤 되면 모두의 어머니이고, 주위엔 언제나 화령의 인품을 따르고 돕는 인물로 가득하다.
좋은 사람, 반듯한 어른 임화령. 뛰어난 기업가, 독선적 인물 진양철. 본을 받기에 임화령은 너무 높이 있지만,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고 타인과 사회적 약자를 대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캐릭터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평범한 우리와 닮은, ‘나만 옳고 내가 가장 중요한’ 진양철은 쉽지 않겠으나 우리가 지양해야 할 인물상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연기를 기막히게 잘하는 배우 이성민이 제대로 마음먹고 입체적으로 진양철을 연기하니 나빠만 보이지 않고 이해가 가고 공감을 일으키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드라마는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데,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인물이자 관습의 표상인 것을 자꾸만 잊게 한다. 드라마를 끝까지 보면 달라지리라, 진도준의 활약이 드라마의 지향점을 선명히 드러내리라 기대하며 오늘 밤 9화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