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24년 만에 찾아온 첫사랑 [양경미의 영화로 보는 세상]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4.04.05 16:03  수정 2024.04.05 16:04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불교 용어 중에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생이나 현생에서 지은 업에 의해 돌아가는 인과법칙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을 조성하면 인연이 일어나고 그것은 우연이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인의 결과라는 것이다. 만남과 연관된 말로 ‘회자정리 거자필반’도 있다. 이별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별을 당연한 이치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최근 북미 영화계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만남과 헤어짐, 전생과 인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75관왕을 수상했고, 제9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는 작품상 및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다.


12살 해성(유태오 분)과 나영(그레타 리 분)은 소꿉친구였고 나영은 해성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나영은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가게 되고 12년 후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간다. 어느 날 나영은 SNS를 통해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한번의 12년이 흐른 후 해성은 나영과의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을 찾는다. 수많은 만약의 순간들이 스쳐가며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감정들이 다시 교차하는데 이들에게 서로는 기억일까 아니면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영화는 성장 과정에 있는 이민자 자녀의 심리 상태를 잘 담아냈다. 연출을 맡은 셀린 송은 미국에서 극작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영화 ‘넘버3’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기도 한 그는 12세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나영은 성장 과정에서 비주류 이민자 자녀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해냈다. 고국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시험에서 1등을 놓쳐 속상해하고 극작가로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상을 타겠다는 포부와 야망도 가진다. 영화는 이민자들의 정체성 혼란과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고충을 잘 담고 있다.


한국인만의 정서와 감성이 녹아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북미에서 ‘미나리’ ‘오징어게임’ ‘기생충’ ‘성난 사람들’ 등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을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도 전생과 인연이 자주 등장한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인연을 강조하는 한국적 문화가 녹아있는 것이다. 셀린 송 감독은 서양에서 생소한 한국적 정서인 전생과 인연의 이치를 아주 자연스럽게 담아내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K-콘텐츠 세계화 전략의 방향성도 제시한다. 영화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과 해성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이틀 동안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그들의 인연을 돌아보는 운명 같은 이야기다. 내용은 한국적이지만 미국 현지화 전략을 통해 한국만이 아닌 글로벌한 콘텐츠로 전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샀다. 독립예술영화의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한 할리우드 제작사 A24와의 협업도 한국영화 세계화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콘텐츠 시장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위기에 처해있지만, 한국을 소재로 한 콘텐츠는 해외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 K-콘텐츠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K-세계관의 확장이 필요하다. 배우와 감독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한국적 콘텐츠의 현지화를 통해 흥행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한류와 K-콘텐츠를 재정의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CJ ENM과 할리우드 영화사 A24의 협업으로 앞으로 국내 콘텐츠가 글로벌 콘텐츠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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