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가 내놓은 ‘추억 알약론’
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의 에피소드들은 어찌나 현실적인지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 저거 내 얘기인데’ 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이다. 영화는 오래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남이 되어가는 과정, 아니 남으로 살아갈 때까지의 지리멸렬한 순간들을 그린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 영화. 영화가 세상에 만들어지고 우리가 보는 이유 혹은 봐야 하는 가치는 숱하고 깊지만, 정서의 교감과 연대가 한 세대 내에서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우리가 같은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동료구나’를 깨닫게 하고 동료로 만드는 쉽고도 중요한 문화예술적 방식이 영화다.
그중에서도 멜로영화의 역할은 정서의 정화와 공감, 분유에 있어 굉장히 특별한데. 특히나 요즘처럼 웬만한 대작 영화로는 OTT 드라마 시리즈의 규모와 때깔을 따라잡기 힘든 상황에서, 액션이나 SF판타지 대비 평균 관객 수로 제작하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장르면서. AI(인공지능)가 대세인 시대에 인간의 특장(특기와 장기)이라 할 ‘사랑’ 이야기를 펼치기에 2시간 몰입으로 보는 이를 집중시킬 수 있는 영화가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빙 돌려 말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보릿고개를 겪는 한국영화 산업에 어쩌면 우리끼리의 문화적 동질성과 감성 코드의 공감력이 큰 멜로영화가 시대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다시금 극장가에 르네상스가 도래할 때까지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 생각이다.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감독 형슬우, 제작 ㈜26컴퍼니, 배급 ㈜영화특별시SMC)는 멜로영화 강화론을 강화하는 영화다. 먹지 않겠다고 해서 하나만 끓인 남자친구에게 여자친구가 “나, 라면 한 입만~”이라고 장난처럼 던진 한마디가 블라블라의 과정을 거쳐 연인 사이에 얼마나 치사한 싸움과 파국을 부를 수 있는지의 점층법을 영화는 차분히 보여 준다.
사귀기 시작한 날은 분명한데 헤어진 날은 어느 날이었는지 모호한 진실을 명확히 짚어낸다. 단지 서로의 기억이 달라서가 아니다. 우리의 사랑이 끝난 날은 언제일까. 그저 익숙함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남을 이어갔던 나날들도 사랑하던 때로 쳐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는 어쩌면 새로운 천체물리학 가설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공식들이 얽히고설킨 사랑의 방정식을 ‘뼈 때리게’ 끄집어낸다.
기가 막히게 솔직해서 웃음을 부르고 얄밉도록 집요해서 눈물을 부르는 지리멸렬 연애담의 무릎 치게 만드는 재미는 직접 확인해 보시길 추천한다. 다만 한 가지, 영화를 보시든 그렇지 않든 오래된 연인들이 진정 사귀는 건가 싶은 결속력 속에 알게 또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에 관한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도 모른다’의 답은 너무나 설득력 있어서 소개하고 싶다.
준호(이동휘 분)와 헤어진 아영(정은채 분)에게 다가서려는 경일(강길우 분)이 아영에게 건네는 말이다. 단 몇 문장으로 상대성 이론보다 어렵디어려운 ‘이별하지 못하는 까닭’을 명쾌하게 해석해내는 영화, 그 말만 듣고도 단번에 이해해 버리는 우리. 이 공감과 공유의 감성과 코드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게 너무나 소중하지 않은가.
“서로 좋았던 기억을 (콩자반을 건드리며) 이, 약 한 알이라고 쳐보자고요. 그러다 상대한테 정떨어지고 미워지고 그럴 때, 이 약을 한 알 먹고 자요.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면 또 괜찮은 것 같거든요. 근데 그게 약 기운에 잠시 잊었던 거죠. 자기가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르고.”
지금 당신에게 연인이 있다면(혹은 있었다면)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는지, 좋았던 ‘추억’을 알약 삼아 관계의 문제와 서로에게 남기는 상처를 모른 척하는 ‘진통제’로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외면 말고 직면해 보자. 어쩌면 이미 헤어진 것이나 진배없는 관계일 수도 있고, 드물디드문 ‘사랑의 기적’을 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