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환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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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로 활동 중인 판호(고도하 분)는 오늘도 현장에서 배우의 꿈을 꾼다. 사실 판호가 엑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배운 건 연기가 아니라 척이었다. 주연배우 대사에 방해되지 않게 입만 뻥긋거리는 척, 행인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척, 음악 없이 춤추는 척, 그리고 온갖 부당한 처사와 무시에 바보처럼 웃음을 참는 척 등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날 촬영 현장에서 만난 태미 덕분에 깨닫게 됐다. 태미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배우라는 직업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엑스트라 연기를 하고 있다. 심지어 엑스트라 경험이 많아야 알 수 있는 입술로 말하는 걸 다 알아듣는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알고 보니 태미의 아빠가 얼마 전 다른 여자와 재혼해 화제가 된 유명 배우였다. 태미는 배우가 직업인 아빠가 엄마와 자신에게도 연기를 하며 외도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우를 경멸하지만, 배우를 꿈꾸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날 우연히 조연 배우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엑스트라들에게 대사 한 줄의 역할을 맡을 기회가 찾아왔다. 판호는 다른 엑스트라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선보였기에 기대에 부풀었지만 배역은 주연 배우 백광호(김시호 분)의 입김으로 태미에게 돌아갔다.
판호는 태미가 연기하는 걸 구경하기 위해 현장에 남았다. 백광호는 연기하며 태미의 팔을 아프게 잡는가 하면, 연기하며 몰래 옷 속으로 손을 넣는 짓을 저지른다. 참지 못한 태미는 현장을 벗어나고 판호가 태미 대신 연기를 하게 됐다.
문제의 신을 잘 끝낸 후, 판호는 엑스트라를 무시하고 가볍게 보는 백광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린다. 이 광경을 본 태미까지 가세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제 더는 엑스트라 활동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하는 판호에게 태미는 엑스트라 그만하고 배우를 하자면서 웃어 보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러 떠난다.
엑스트라로 시작해 '척'의 반복 속에서 버텨온 판호는 어쩌면 연기보다 '현실을 넘기기 위한 연기'에 더 익숙한 인물일 수 있다. 무시당해도 웃는 척, 기대하지 않는 척, 상처받지 않은 척. 배우의 꿈을 품고 있지만, 매 순간 체념과 타협 사이를 오가며 적당히 버텨야 했던 삶. 판호는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 있다.
그런 판호가 태미를 만나면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며낸 연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으로서의 연기다. 태미는 연기를 경멸하면서도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판호는 그 태미를 통해 지금껏 참아왔던 무시에 처음으로 저항을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진심을 외면한 채 살아온 자신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감독은 우리가 비범해지는 순간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비범한 순간은 거창한 성공이나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나를 위해 말하고, 행동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찾아온다. 이 작품은 영화 속 배역 하나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엑스트라의 자리를 통해, 모두가 주연이 될 수 있는 ‘한순간의 용기’를 유쾌하게 포착했다. 러닝타임 35분.
[D:쇼트 시네마(117)] '엑스트라올디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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