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적’으로 규정한 러시아 비밀 문서 공개돼
중·러, ‘브로맨스’ 자랑하지만 ‘정보’ 빼내기에 혈안
中, 우크라전 러시아 통해 서방무기 대응책에 관심
러, 첩보활동 이유 中과의 협력 포기하지 않을 듯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러시아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 타스/연합뉴스
지난달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일(전승절) 80주년 열병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사열대 정중앙에 나란히 앉아 군사 행진을 지켜보며 시종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했다.
두 정상은 가슴에 러시아 승리의 상징인 게오르기 리본을 달고 있었다. 주황색 두 줄과 검은색 세 줄로 이뤄진 이 리본은 1769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무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한 ‘성게오르기우스 훈장’ 장식에서 유래했다. 2차 세계대전 승리 60주년인 2005년엔 대대적으로 승전 기념물로 사용됐다.
중국 베이징(北京) 정상회담 이후 7개월여 만에 다시 만난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전날 크렘린궁에서 서로를 “나의 오랜 동지”, “친애하는 동지”라고 부르며 ‘지기’(知己)를 만난 듯 반갑게 악수했다. 이들은 7시간 30분에 걸친 마라톤 정상회담을 통해 ‘새 시대에 포괄적 파트너십과 전략적 상호작용 강화’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해 친밀감을 드러냈다.
특히 다음날인 이날도 두 정상은 붉은 광장에 입장할 때부터 함께 등장하고 수시로 통역을 통해 웃음꽃을 피우며 진한 ‘브로맨스’(남성 간의 친밀한 우정)을 선보여 대외적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한층 과시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의 제재 속에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밀착관계를 보여온 러시아가 내부적으로는 중국을 ‘적’으로 규정해 견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러시아 보안당국 문건이 공개됐다. 러시아는 중국이 자국에서 간첩 행위와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는 만큼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해 무척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달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가한 러시아 해군들이 러시아 승리의 상징인 대형 게오르기 리본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대외적으로 중국과 매우 가까운 관계인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대내적으로는 중국에 대해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7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문건을 인용해 보도했다. 2023년 말∼2024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8쪽 분량의 이 문건은 중국에 대한 러시아 정보 당국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이 문건을 통해 ▲러시아인 대상 스파이 모집 시도 ▲광산 회사 및 연구기관을 통한 중국 정보 요원들의 북극 스파이 활동 ▲정권에 불만이 있는 러시아 과학자 포섭 ▲민감한 첨단기술 확보 시도 ▲러시아 유학생 감시 강화 등이 중국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고 폭로했다. 사이버범죄 단체 ‘아레스리크스’로부터 입수한 이 문건은 최종본이 아닌 초안으로 보이며, 6개 서방 정보기관이 이 문서에 관해 “진짜”로 평가했다고 NYT는 전했다.
따라서 연방보안국의 문건 내용은 러시아와 중국이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의 매우 긴밀한 관계 속에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고 있지만 옛소련 시절 사회주의 진영 내 패권을 놓고 갈등했을 때의 불신이 그대로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건에 따르면 중국은 '적'으로 묘사돼 있으며, 중국이 러시아인 스파이를 모집하려는 시도를 강화하고, 정권에 불만이 있는 러시아 과학자들을 유혹해 민감한 기술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것이 주내용으로 담겼다.
러시아 연방보안국 정보 관리들은 “중국이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후 전쟁정보를 수집해 자국군의 부족한 실전 경험을 보충하려고 시도했다”며 “드론(무인기)를 이용한 전투 방법이나 전자전, 새로운 유형의 서방 무기 대응책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 2019년 5월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핵추진 쇄빙선 ‘우랄’ 진수식이 열리고 있다. 러시아가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한 우랄은 같은 시리즈인 아르티카’, ‘시비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쇄빙선단을 구성하고 있다. ⓒ 타스/연합뉴스
중국이 러시아 내 고위층 포섭에 나선 정황도 확인됐다. 중국 정보 요원들은 러시아 정부 관리나 전문가, 언론인, 사업가들에게 접근했다. 연방보안국은 중국이 옛소련 시절 개발된 대형 위그선(수면 위를 떠서 고속으로 날아가는 선박) 에크라노플란의 개발진을 찾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황도 입수했다.
이에 따라 연방보안국은 중국에 포섭된 것으로 우려되는 인사들을 직접 만나 ‘중국이 러시아를 이용해 기술 등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달했다. 중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메신저인 웨이신(微信·Wechat·중국판 카카오톡) 이용자의 휴대전화를 해킹하는 등 정보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중국이 우크라이나전쟁에서의 러시아군 작전을 염탐하는 것을 주요 위협이라고 연방보안국은 지목했다. NYT는 “중국은 1979년 베트남전 이후 전쟁 경험이 없다”며 “이 때문에 대만과의 갈등이나 남중국해 분쟁에서 드론 등 서방 무기에 대한 자국의 대응 역량을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러시아군 작전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기 사흘 전인 2022년 2월21일 새로운 방첩 프로그램인 '엔텐테-4'(Entente-4)를 승인했다. '엔텐테'는 협정이나 협력관계라는 뜻이다. 이름만 보면 중·러 양국의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 프로그램의 진정한 속내는 중국 스파이들의 정보활동 차단이라고 NYT는 지적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 배치했던 군사력과 스파이 자원을 6400km 이상 떨어진 우크라이나 인근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엔텐테-4의 일환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자료: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화징(華經)산업연구원
중국은 정보요원이 러시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진행하고, 중국에서 수학하는 2만명가량의 러시아 학생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한편 중국인과 결혼한 러시아인을 스파이로 삼으려고 시도한다는 내용도 문서에 적혔다.
중국의 영토 확장주의적 행보도 경계 대상에 포함됐다. 연방보안국은 우크라이나전쟁 확전 후 중국이 러시아의 정보·군사역량이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틈을 이용해 연해주 지역 점령을 시도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 문건에는 일부 중국 학자들이 러시아 영토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러시아 동쪽에서 ‘고대 중국인’의 흔적을 찾았다는 내용도 담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방보안국은 중국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4200여㎞의 달하는 국경를 맞대고 있는 중국의 침략을 우려해 왔다. 지난 수년 동안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땅을 병합한 19세기 베이징조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러시아가 전쟁과 경제제재로 허약해진 데다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의 파워에 맞설 수 없게 되면서 주요 관심사가 됐다. 문건은 중국의 일부 학자들이 러시아에 대한 영토주장을 ‘측면 지원’하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이 인도주의적 지원 등을 가장해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방첩 활동을 강화했다. 연방보안국 요원이 중국 측과 사업협력을 하는 러시아 국민을 만나 “중국이 러시아의 선진 과학연구 결과를 가지려 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NYT는 “문서는 양측의 불신과 의심을 드러낸다”며 양국을 ‘불투명한 관계’라고 강조했다.
ⓒ 자료: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화징(華經)산업연구원
다만 푸틴 대통령이 첩보 활동을 이유로 중국과의 협력을 포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알렉산더 가부예프 미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센터 소장은 NYT에 “푸틴 대통령은 중국과의 협력이 불러올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며 “(협력이 불러올 위험보다) 이득이 더 큰 만큼 협력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중국이 러시아 북부 해안을 따라 형성된 북극 지역과 북극해 항로에 큰 관심을 보이는 대목도 엿보인다.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해를 이용한 항해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시아와 유럽 운송 시간이 크게 단축돼 상품 수출에 매우 유리한 만큼 중국 역시 혜택을 볼 수 있다.
폴 콜브 하버드대 벨퍼센터 선임연구원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무리 두 나라가 제한 없는 협력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에게 유용하다고 해도 결국엔 중국은 (러시아에) 잠재적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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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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