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체급·제작 환경까지…중예산 지원, 더 정교한 설계 필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올해 처음 도입한 ‘중예산 한국영화 제작지원 사업’이 9편의 지원작을 선정하며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총 120편의 공모작 가운데 서류 및 제작계획서 심사를 거쳐 20편이 결정심사 대상으로 추려졌고, 이 중 9편이 최종 선정됐다. 이번 사업은 순제작비 20억 원 이상 80억 원 미만의 장편 극영화를 대상으로 가군(20억~30억 원), 나군(30억~60억 원), 다군(60억~80억 원)으로 나누어 심사했다. 제작비 규모와 시나리오 완성도, 제작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균형 있게 선발했다는 것이 영진위의 설명이다.
ⓒ뉴시스
영진위는 이번 지원을 통해 대형 블록버스터나 초저예산 독립영화로 양극화된 구조 속에서 실종됐던 ‘중예산 영화’의 복원을 노리고 있다.
중간 규모 영화는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 구조와 대중성을 갖추고 있어, 코로나19 이후 위축된 민간 투자를 다시 유도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다.
실제로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연간 60편 가까운 상업영화 신작이 제작됐지만, 지난해에는 20편에도 못 미쳤다. 주요 투자·배급사들이 수익 악화를 이유로 공급 편수를 줄이면서, 제작비 20억~80억 원 사이의 ‘허리’ 구간 영화는 기획조차 어려운 구조로 밀려났다. 이번 사업은 이 공백을 제도적으로 메우겠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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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준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한국영화의 허리인 중예산영화 지원은 어려운 한국영화계에 수혈과 같다. 천만 영화 한 편보다 백만 영화 여러 편이 제작될 때 고용되는 스태프 수도 많아지고, 다양한 제작 경험이 축적돼 다음 영화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선정된 작품은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8억 9000만 원), 변영주 감독의 '당신의 과녁'(15억 원), 장훈 감독의 '몽유도원도'(15억 원), 허인무 감독의 '집밥'(6억 원), 김용균 감독의 '용수철'(10억 원), 박대민 감독의 '개들의 섬'(10억 원), 김선경 감독의 '안동'(12억 원), 권오광 감독의 '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10억 원), 김정구 감독의 '감옥의 맛'(12억 4천만 원) 등 총 9편이다.
영진위는 "일부는 독립영화 출신 감독의 상업 장편 데뷔작이고, 일부는 중견 연출자의 신작으로 장르와 세대의 균형을 고려한 구성"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심사에서는 완성 가능성과 문화적 기여도가 주요 평가 항목으로 작동했다. 수익성 중심이 아닌, 산업 복원력 회복이라는 중장기 목표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에서 기존 지원 사업과 궤를 달리한다는 설명이다.
영진위 관계자는 "제작자 중심의 자율적 기획이 가능하면서도 산업적 유통 가능성을 지닌 중예산 영화의 기반을 다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계 일각에서는 "신인과 중견, 거장 감독을 분리해 심사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시도가 산업 내 다양성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한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선 단순한 자금 지원을 넘어 감독의 경력이나 제작 환경에 따른 체계적인 구분, 관객 수요의 다변화, 창작자 중심의 기획 권한 확대 등 보다 다양한 시각이 정책 설계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번에 선정된 작품 중 상업 장편 데뷔작은 김선경 감독의 '안동'과 김정구 감독의 감옥의 맛' 두 편뿐이었고,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심사 통과 후 자진 철회한 사실까지 알려지며 신인과 기성 감독 간 체급 차이에 대한 논의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 영화감독은 “지원작 발표가 나고 영화계 내부에서는 말이 많았다. '택시운전사'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장훈 감독님을 비롯해 정지영, 변영주 감독님의 작품도 선정돼 있었다. 선로를 틀며 자진지원철회를 했지만, 이창동 감독님의 작품을 뽑지 않으면 '영화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텐데 안 뽑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라며 "가·나·다군으로 제작비 구간을 나눈 건 의미 있지만, 이 안에서도 신인, 중견, 거장 등 감독 체급에 따른 세분화가 필요하다. 지금 구조에선 경험치에서 오는 불균형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심사위원을 오랜 시간 영화계에 몸 담았던 사람부터 씨네필, 검증된 영화 유튜버 등 구성이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사위원부터 배심원 제도를 도입한다면 감독들에게 보다 열려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책 도입 자체를 반기는 현장의 목소리도 뚜렷하다. 또 다른 감독은 "영진위의 이런 시도, 의도가 너무 좋고 반갑다. 어떻게든 한국영화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명확해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한 뒤, "일각에서는 중급 영화보다 독립영화가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산업이 너무 많이 무너져서 일단 영화관에 관객이 가지 않고, 이런 허리급 영화엔 투자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런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중견 프로듀서는 "이번에 선정된 9편이 실제로 제작되고, 극장과 관객, 투자자 앞에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앞으로 중예산 영화 생태계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이 흐름이 단발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후속 투입과 시장 반응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영진위는 이번에 선정된 9편이 국내 투자·배급사 및 창업투자회사와 메인 투자·배급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의 정책금융지원 사업과 연계해 제작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후속 지원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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