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올해 0%대 성장에 그치는 동안 대만 4.45%로 상향 조정
AI 기술 확산 및 컴퓨터 칩에 대한 글로벌 수요급증이 호재로
대만 정부의 실용과 與·野 친기업정책엔 맞손이 경제성장 핵심
AI산업에만 치중해 먹고사는 것은 대만으로서는 위험 부담 커
대만 경제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다. 한국이 13조 2000억원 규모위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뿌리기고도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0%대에 머물며 ‘죽을 쑤고 있는’ 사이 대만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5% 가까이로 상향 조정하는 등 힘차게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 행정원 주계총처(主計總處·DGBAS)가 내놓은 경제 전망에서 대만 정부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인공지능(AI) 칩에 대한 강력한 수요에 힘입어 4.45%로 제시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17일 보도했다. 지난 5월 내놓은 전망치(3.1%)보다 석달 만에 1.35%포인트(p), 자그마치 44%나 끌어올린 것이다.
미국발(發) 관세 파고에 한국 등 대미 수출국들이 고전하는 것과 견줘 대만의 성장세는 눈이 부실 정도다. 차이위타이(蔡鈺泰) 주계총처 종합통계처장은 “5월 이후 세계경제 및 무역성장률 전망 개선, 저비용 고효율 AI모델인 중국의 딥시크(deep seek·深度求索)의 등장에 따른 AI 수요 우려 요인 완화, AI인프라 개발을 가속화한 미국의 정책 변화 등을 토대로 성장률 전망치를 올려 잡았다”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는 앞서 4월 대만에 대해 32% 고율관세를 부과했고 8월부터 20%로 하향 조정했다. 관세 25%에서 15%로 낮아진 한국 등 주요 경쟁국들보다 오히려 불리한 여건이다. 하지만 대만 경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분기에 8.01%나 깜짝 성장했다. 이 기간 수출이 34%나 급증한 덕이다.
대만의 2분기 성장세는 전자부품과 정보통신기술(ICT) 제품이 주도했다고 주계총처는 분석했다. 이들 제품은 대만 수출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AI수요 확산에 따라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타이지뎬(臺積電·TSMC)과 세계 최대 반도체 패키징(후공정) 업체인 르웨광(日月光·ASE) 반도체 등의 수출이 크게 증가한 덕분이다.
대만 경제의 저력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서 나온다. 중국의 위협뿐 아니라 지난해 의회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등 정치적 환경이 매우 불안정한 대만이지만, 기업 살리기 앞에서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대만은 2000년대 들어 보수를 지향하는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 집권 8년(2008~2016년)을 빼고 진보 성향의 민진당(民主進步黨)이 잇따라 집권했다.
천수이볜(陳水扁)·차이잉원(蔡英文) 전 총통에 이어 라이칭더(賴淸德) 현 총통까지 민진당 정부의 경제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실용주의’다. 기업들이 몰려 있는 과학·산업단지에 전력·용수 등 ’특혜‘를 베풀었고 이공계 대학 육성, 해외 전문가 유치 등 인재 확보 전략도 기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AI기술 및 컴퓨터 칩에 대한 글로벌 수요급증 시류에 맞춰 대만 정부 차원에서 AI 반도체 중심 전략산업에 대한 투자와 정책 연계도 강화했다. 그 결과 하청업체 취급을 받던 TSMC가 글로벌 공급망 허브 위치에 올랐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민진당과 국민당은 몸싸움을 벌이며 으르렁대지만 첨단 반도체 과학단지 투자와 연구·개발(R&D)비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반도체 기업의 근로시간 유연 적용 등 친기업 정책에는 맞손을 잡았다.
정부·의회의 측면 지원 덕택에 TSMC는 대만 경제성장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TSMC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면서 엔비디아와 AMD, 애플 등 미국의 주요 기업의 칩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 AI 하드웨어의 핵심인 스마트폰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세계 1위는 미국 퀄컴이 아니라 대만 롄파커지(聯發科技·MEDIATEK)다. 대만은 또 다른 AI 응용처인 PC 시장 세계 5·6위인 화숴(華碩·ASUS) 컴퓨터와 에이서(Acer)도 보유하고 있다.
TSMC 외에도 AI 생태계는 탄탄하다. 대만의 AI 파워는 반도체부터 서버, 하드웨어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가치체인에서 나온다. 엔비디아 AI 서버 생태계에 들어간 대만 기업으로는 훙하이커지(鴻海科技·Foxconn)그룹를 비롯해 광다(廣達·Quanta)컴퓨터, 웨이촹쯔퉁(緯創資通·Wistron), 잉예다(英業達·Inventec), 타이다뎬쯔(臺達電子·Delta Electronic), 웨이잉커지(緯穎科技·wiwynn), 궈쥐(國巨·YAGAO), 신싱뎬쯔(欣興電子·UniMicron), 젠딩커지(健鼎科技·Tripod technology), 신화커지(信驊科技·ASpeed)가 있다.
이들 10개 기업의 지난해 매출액 규모는 10조 9646억 대만달러(약 502조원)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5.7%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4274억 대만달러로 27% 급증했다. 올해 대만의 연간 수출액도 5892억 달러(약 821조원)에 달할 것으로 주계총처는 내다봤다. 지난해(4750억 달러)보다 24% 늘어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이런 좋은 흐름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예측됐다. 다만 성장률은 2.81%로 다소 둔화할 것으로 주계총처는 예측했다. 내년 수출은 2.19% 늘어난 6021억 달러로 600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성장과 대만달러 가치상승으로 내년에 1인당 GDP가 4만 1019달러를 기록해 4만 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대만 정부는 예측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대만의 1인당 GDP는 3만 4426달러로 추정된다. IMF는 4월 보고서에서 한국과 대만의 1인당 GDP 4만 달러 돌파 시점을 2029년으로 예상했는데 대만이 3년이나 앞당기는 셈이다.
한국·대만과 함께 ‘아시아 4룡(龍)’으로 꼽히는 싱가포르와 홍콩 역시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싱가포르 통상산업부는 싱가포르의 2분기 GDP가 전년 같은 기간보보다 4.4%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를 반영해 올 성장률 전망치를 0∼2.0%에서 1.5∼2.5%로 높였다. 홍콩특구 정부 통계처도 홍콩의 2분기 GDP는 수출과 소비증가에 힘입어 전년 같은 기간보다 3.1% 증가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는 낮아지고 있다. 한국은 2014년 1인당 GDP 3만 달러 시대를 맞이했으나 지난해까지 3만 달러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1분기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 2분기에 0.6% 성장했다. IMF는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0%에서 5월 0.8%로 0.2%p 낮췄다.
한국의 정치 상황 및 글로벌 통상 불확실성 등으로 상반기 기업실적이 부진한 것을 IMF는 전망치 하향 조정의 근거로 들었다. 관세 직격탄으로 2분기 대미 수출은 5.2% 감소했으며 향후 한국 경제 회복의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1인당 GDP는 올해 기준 3만 7000 달러로 예상된다.
대만은 한국에 비해 경제 규모는 작고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하나의 산업에 기대 먹고사는 것은 위험 부담이 따르지만 대만의 반도체 패권은 이런 우려를 무색하게 할 만큼 강하다. 같은 반도체 수출국임에도 미국 관세에 취약한 정도에서 메모리 반도체 중심인 한국과 AI 파운드리 강국인 대만은 크게 차이가 난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중국에 의해 대체될 위기에 처한 한국 제조업에는 없는 강력함이다.
이 때문인지 트럼프 대통령의 반도체 관세 공세도 대만은 피해 가고 있다. 그는 반도체 수입품에 100% 품목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미국에서 생산하면 면제”라고 조건을 달았다. TSMC는 미국 관세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3월 미국에 100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3개의 현지 공장, 2개의 첨단 패키징 시설, 애리조나 연구개발센터 등을 설립하기로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TSMC는 미국이 예고한 100% 반도체 관세 면제 혜택을 받는다고 대만 정부가 밝혔다. TSMC의 미국에 대한 총투자액은 165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 15%에 비해 대만에 대한 상호관세는 20%로 높긴 하지만, 반도체 수출 중심의 대만 경제에는 큰 타격이 없는 셈이다.
다만 AI에 치중한 대만 경제의 위험은 존재한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보고서를 통해 내년 AI 서버의 성장이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트렌드포스는 미국의 관세장벽과 지정학적 위험성의 회피, 중국의 상반기 보조금 정책의 혜택을 위해 서버와 태블릿, 노트북, 자동차 등의 올해 상반기 출하가 대폭 늘어났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AI 서버 구축으로 인해 올해 AI 서버 출하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다만 이런 선주문 효과가 사라지면 올해 4분기에는 주문량 감소 및 재고 조절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고 트렌드포스는 내다봤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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