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북의 요원들이 다시 총구를 맞댄다. '휴민트'(HUMINT)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뜻의 첩보 용어로,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는 이 단어의 정의를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시선은 차가운 정보 체계가 아닌, 그 체계 뒤의 사람과 관계를 비추며 극한의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믿고 지키려는 선택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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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동력은 국정원 블랙요원 조 과장(조인성 분)의 부채감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휴민트였던 북한 여성 김수린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자, 조 과장은 그가 남긴 인신매매 사건의 실마리를 포착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표면적으로는 북·러 밀착을 견제하고 정보 주도권을 쥐려는 당국의 명분을 따르지만, 조 과장을 움직이는 진짜 엔진은 지켜주지 못한 자에 대한 죄책감과 시스템 너머의 정의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휴민트 채선화(신세경 분)를 마주하며,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 분)이 러시아 범죄 조직과 결탁해 동포 여성들을 매물로 삼는 참혹한 실태에 다가선다.
평양 역시 황치성의 수상한 궤적을 감지하고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 분)을 급파한다. 공교롭게도 박건에게 채선화는 과거의 연인이자 지워지지 않은 상흔 같은 존재다. 황치성은 자신의 비리를 은닉하기 위해 박건을 제거할 미끼로 채선화를 위험천만한 사지로 몰아넣고, 이 지점에서 영화는 남과 북의 이념을 넘어 오직 ‘사람’을 구하기 위한 사투로 급회전한다. 서로 다른 깃발을 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한 조 과장과 박건이지만, 채선화를 구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 아래 두 남자는 기꺼이 총성이 난무하는 차가운 공기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이 영화의 묘미는 이해관계에 따라 시시각각 재편되는 액션의 역학구조다. 남북 요원으로서 서로의 심장을 겨눠야 하는 조 과장과 박건의 대치, 자신의 범죄를 은닉하려 박건을 없애려는 황치성의 탐욕, 그리고 공통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손을 잡는 기묘한 공조까지. 류승완은 이 다층적인 대립각을 낭비 없이 배치하며 장르적 쾌감을 쌓아 올린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인물의 선택이 뒤따르고, 몸이 부딪히는 순간마다 관계의 균형이 달라진다. 류승완은 액션을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장치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첩보물 특유의 정보 과잉을 걷어내고 인신매매와 마약 밀반입이라는 사건을 내세운 것도 영화가 직관적으로 뻗어나가는 장치가 됐다.라트비아 로케이션이 선사하는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총격신, 카체이싱은 '휴민트'가 구축한 서늘한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뒷받침한다.
특기할 점은 액션의 타격감 사이로 흐르는 멜로의 농도다. 박건과 채선화의 과거사가 자칫 장르적 긴장감을 해칠 수 있는 과잉된 감상으로 흐르는 대신, 두 남자가 왜 기꺼이 총성이 난무하는 사지로 뛰어드는지에 대한 감정적 개연성을 부여하는 정도로 절제된다.
2012년 '베를린'의 표종성이 향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잔영을 이스터 에그로 활용하며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연결지은 점도 흥미롭다. 류승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장르 안에서 서사의 깊이를 한 뼘 더 확장해냈다. 러닝타임 1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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