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주 원료의약품 교체 시도, 대표이사가 저지
의약품 원료, '가격'보다 신뢰성·안전성 중요
한미약품 본사 전경 ⓒ한미약품
‘벽돌의 법칙’. 기자 초년생 시절 중후장대(重厚長大) 업종을 출입하게 됐을 때 사수였던 선배가 전수해준 법칙입니다. 벽돌은 누가 만들든 일정 수준의 품질과 규격만 충족된다면 가격이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얘깁니다.
철강, 정유, 화학, 조선 등 품질이 균일한 제품을 만드는 중후장대 업종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업황을 좌우하니 이 분야를 취재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는 당부였습니다. 차에 기름을 넣을 때 SK 주유소든 GS칼텍스 주유소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가격이 싼 게 중요하지. B2B(기업간 거래) 업종에서는 이 법칙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실제 현장을 취재해 보니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였고, 이렇게 선배에게 전수받은 ‘벽돌의 법칙’은 제가 선배가 됐을 때 중후장대를 출입하는 후배들에게 도제(徒弟) 식으로 전수됐습니다.
그런데, 중후장대에 익숙해 있다 전자, 유통 등 소비 업종으로 출입처를 바꾸게 된 후배들한테 종종 관성적 오류가 발견되더군요. 수요자의 기호나 용도가 거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업종은 ‘벽돌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1999년 대만 대지진 발생 당시 삼성전자의 주가가 크게 올랐던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는 대만 업체들이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철수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만에서의 생산 차질은 메모리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경쟁자인 삼성전자가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습니다.
D램이나 낸드플래시와 같은 메모리반도체는 용량과 규격만 동일하다면 어떤 업체가 만들건 상관이 없습니다. ‘벽돌의 법칙’이 적용되는 분야죠.
하지만 애플이 생산차질을 빚는다고 해서 삼성전자가 큰 수혜를 입진 않습니다. 아이폰을 선호하는 이들은 시장에 아이폰이 동났다고 무조건 갤럭시를 사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특정 분야에서는 적절한 법칙이라도 그걸 아무 데나 들이대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최근 한미약품에서 벌어진 논란을 보니 문득 이 ‘벽돌의 법칙’이 생각났습니다. 한미약품 모회사 한미사이언스의 최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원가절감을 명분으로 이상지질혈증 복합제 ‘로수젯’의 원료의약품을 저렴한 중국산으로 대체하려 하며 빚어진 논란입니다.
신 회장은 모회사 최대주주지만, 한미약품에서는 아무 직책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대표이사를 ‘패싱’하고 공장장과 임원들에게 제약업체로서는 치명적인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는 원료 교체를 지시한 것입니다.
물론 원가절감은 기업 수익성 확보 측면에서 중요한 경영적 판단입니다. 싼 원료로 만들면 제품 가격경쟁력도 높이고 마진도 많이 남길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철강, 화학 등 중후장대 업종에서는 원가절감이 곧 경쟁력입니다.
하지만 제약업체에도 그런 ‘벽돌의 법칙’이 적용될까요? 우리가 아플 때 먹는 약을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 회사가 싸다는 이유로 검증되지 않은 원료를 사용한다면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부작용으로 인명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회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당장 제약업체로부터 약을 받아 판매하는 약사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대한약사회는 지난 5일 “의약품 원료 변경은 단순한 경영 판단이나 비용 절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건강 및 의약품 신뢰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충분한 과학적 검증과 규제 당국의 엄격한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결국 한미약품 대표이사인 박재현 사장이 제동을 걸면서 원료 수급처 교체 업무는 중단됐습니다. 그는 “단순히 저가 원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에서 유통된 적 없는 검증되지 않은 수입 원료였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했다. 로수젯 원료 변경과 관련된 모든 업무 중단을 지시했고 현재 중단된 상태”라고 지난 9일 데일리안에 알려왔습니다.
일단 사태는 봉합됐지만, 단순히 해프닝으로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바뀐 저가 원료에 문제가 있었다면 회사의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존폐 위기까지 몰릴 뻔했습니다. 한미약품과 그 모회사 한미사이언스가 문을 닫거나 주가 폭락을 겪는다면 가장 많은 주식을 들고 있는 신 회장의 피해가 가장 클 것입니다.
지난해 2월 경영권 분쟁이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신동국 회장, 라데팡스 연합의 승리로 일단락되며 이들 4자 연합은 주력 계열사인 한미약품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업의 특성을 잘 아는 전문가가 회사를 이끌어야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주주의 원료의약품 교체 시도를 대표이사가 막은 일은 한미약품에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판단됩니다. 회사의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 그리고 국민 건강을 위해 4자 연합의 약속이 계속해서 지켜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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