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아크로폴리스와 민중들의 아고라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kipeceo@gmail.com)

입력 2014.03.16 10:07  수정 2014.03.17 08:50

<박경귀의 ad greece!③>신들과 민중들의 소통 공간

아테네 시 정중앙에 위치 그리스 문명의 2개의 축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고대 그리스를 생각할 때, 아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아고라가 아닐까싶다. 그리스 문명의 대명사가 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kropolis)와 아고라(Agora)는 그리스 문명의 특질을 가장 잘 나타내는 유적이다. 그리스 문명의 모든 것이 응축된 공간이자, 문명의 상징인 셈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도 제 각각 크고 작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갖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가 조성된 역사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대개 미케네 시대, 즉 기원전 16세기에서 12세기에 이미 조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오랜 역사다. 미케네 시대에 한 때 왕궁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에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에 의해 잠시 왕궁으로 쓰였지만, 그 이후 아크로폴리스는 공동체의 숭배를 받는 신역(神域)이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높다'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아크로(akros)'의 어원이 말해주듯 높은 곳에 위치한 폴리스, 곧 성채이자 수호신들이 거주하는 국가의 성소(聖所)였다. 또 시민들의 정신적 위안소이자, 마지막 피난처이기도 했다.

동방의 세계에서 제왕의 궁전을 중심으로 성채가 조성된 것과 사뭇 다르다. 아크로폴리스는 왕의 궁전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의 종교적 성지였던 것이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인의 자유정신과 종교의식을 대변한다. 아크로폴리스에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파르테노스( Athena Parthenos, 아테네 처녀신)’ 신전을 세운 이유다.

아테네 전경의 모형도다. 시내 중앙의 깎아지른 절벽 위 높은 언덕 위에 굳건한 방벽으로 둘러싸인 아크로폴리스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아테네 시가지가 넓게 형성되었고, 그 둘레를 외성(外城)이 보호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아래 남쪽의 큰 원형 건물은 디오니소스 극장이다. 아테네의 신 아크로폴리스 뮤지엄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시대 변천에 따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박경귀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지형적으로도 아테네 도시 정중앙에 위치하여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해발 150여 미터의 석회암 동산이지만 평지 가운데 우뚝 솟아있어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아테네 도심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크로폴리스는 서쪽에서 올라오는 언덕을 빼고 3면이 자연 절벽과 방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다. 아테네인들이 이곳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든 이유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필자는 아크로폴리스의 지형 상 특징 및 방벽의 군사적 효용을 파악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주변을 도보로 돌았다. 멀고 힘든 일이었다. 중간 중간을 건너 뛰어 중요지점을 중심으로 돌기도 했다. 또 나중에 아크로폴리스에 위로 올라갔을 때 역시 동서남북 사방의 전경을 확인하며 위 아래에서 조망하면서 느꼈던 소회를 대조해 볼 수 있었다.

아크로폴리스가 동서남북의 위, 아래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다양한 느낌을 준다. 왜 이들은 이토록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해야만 했을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의 노역이 투입되었을 것인가? 고대의 생존방식은 불가피하게 성채를 요구했을 것이다. 아티카 전역의 농촌지역과 아테네 중심의 시가지로 이루어진 아테네는 주변의 침입에 대한 최후의 방어지로 아크로폴리스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페리클레스가 연 아테네의 황금시기엔 아크로폴리스는 더 이상 아테네인만의 성소가 아니었다.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자 자부였을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크로폴리스에 수많은 신전을 복원하고 방벽을 정비하였던 이유도 그리스의 영광을 영속화하려는 자부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과욕이 지나쳐 제국주의의 길로 빠지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남쪽 아래쪽에서 올려다 본 아크로폴리스 모습이다. 깎아지른 방벽 뒤로 파르테논 신전의 상부 구조 일부가 보인다. ⓒ박경귀

ⓒ북쪽 아래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의 모습이다. 가파른 자연 절벽위에 인공 절벽을 쌓아 험준한 성채를 만들었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의 남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부분이다. 자연 바위의 절벽위에 인공 방벽이 축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위에서 서쪽 방면으로 바라본 전경이다. 수림 속의 오른쪽 바위 언덕이 대법정 역할을 한 아레오파고스이다. 멀리 왼쪽 언덕은 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이다. 정상에 송덕비가 있다. 지평선 쪽 남서쪽으로 아주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정은 3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살라미스 섬이다. 1687년 베네치아인들이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그와 전쟁을 벌이면서 이곳의 대포 진지에서 파르테논을 포격하여 상당부분을 파괴시켰다. 현재의 모습은 그 상흔의 증거하고 있다. 아이폰 파로라마 사진으로 포착했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위에서 동남쪽으로 내려다 본 아테네 시가지 전경이다. 바로 아래에 디오시소스 극장, 왼쪽 멀리 제우스 신전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 쪽으로 나아가면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 항구와 에게 해로 연결된다. 지평선 오른쪽 끝의 희마한 산은 살라미스 섬이다. 아이폰 파로라마 사진으로 포착했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정상의 동쪽에서 바라본 아테네 시가지 전경이다. 중앙 쪽의 삼각형 모양의 작은 산은 해발 273m의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리카비토스 언덕(Likavitos Hill)이다. 아테네 여신이 아크로폴리스의 성을 쌓기 위해 바위를 날라 오다 떨어뜨린 바위로 전해진다. 대형 그리스 국가가 휘달리는 곳은 아테네 전경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곳이다. 시내 조망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테네 여신이 아크로폴리스의 성을 쌓기 위해 바위를 날라 오다 떨어뜨린 바위로 전해진다. ⓒ박경귀

애초에 아크로폴리스의 축조 목적은 방어적 목적이 더 강했다. 이후 종교적 성격이 덧붙여졌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신전을 비롯하여 여러 신전들이 아크로폴리스 정상의 넓은 공간을 채우게 된다.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바로 아크로폴리스가 신들의 공간으로 변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다. 참주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대한 숭배가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정상의 공간이 동서의 길이가 270m,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이 156m에 이를 정도로 작지 않다. 특히 동북쪽에는 특별한 건물을 배치하지 않고 빈 공간으로 두어 작은 광장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석회암 산정인지라 평지가 아니라 울통불퉁 바위투성이다. 현재 그리스 국기가 휘날리는 주변이다. 아크로폴리스는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신전을 둔 종교와 정치의 공간이다.

각종 신전과 시설물들이 가장 완벽한 형태로 존재했던 2세기에서 3세기 시기의 아크로폴리스의 전경이다. 아름다운 성채다. 오른쪽 황토색지방은 반원형 건물은 아티쿠음악당, 회랑의로 이어진 끝이 디어니소스 극장이다. 아크로폴리스의 정문인 흰색 대리석 계단과 흰 대리석 건 대문이 프로필레아이다. 그 오른쪽 열 건물은 니케신전, 왼쪽 사각 구조물은 아그리파 기념비이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서서 오른쪽에 보이는 가장 큰 신전이 페르테논 신전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신전이 에렉테이온 신전이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는 국가의 전란 시에는 최후의 방어거점이 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3차 침입시기에는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 섬으로 소개(疏開)된 이후, 아크로폴리스에 잔류한 수백 명의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의 수만 명과 대적하기도 했다. 워낙 험준한 방벽으로 둘러싸여 한동안 페르시아 군이 고전했다. 가까스로 북쪽 절벽 틈 사이로 난 샛길을 찾아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파르테논 신전과 모든 시설물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필자는 페르시아 군이 찾아낸 비밀 통로를 확인하지 못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입구인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도리아식 건물의 웅장한 아름다움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세계문화유산 제1호이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무기고 및 군대의 필수 시설도 일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를 보면, 기원전 404년 30인 참주정치 시기엔 집권파 3000인을 제외한 모든 시민의 무기를 압수하여 아크로폴리스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고대 국가 시기에 너비 500여 미터 길이 700여 미터의 꽤 넓은 공간에 3면에 주랑이 들어서 있었다니 규모가 볼 만 했을 듯싶다. 하지만 현재는 주변의 도시화가 진전되어 당시의 큰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광장 동편에 1950년대에 재건되어 현재는 아고라 박물관으로 쓰이는 빨간 지붕의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이 미약하나마 옛 경관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르코폴리스의 북쪽 아테네 시가지의 모습이다. 녹음이 우거지고 석조 잔해들이 간간히 보이는 중앙부분이 아고라 광장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황토색 지붕의 주랑은 아탈로스의 스토아이다. 아고라에 모이던 시민들의 사교와 토론,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경귀

아테네 전성기의 아고라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시장을 오가는 수많은 시민들, 여러 동맹국과 동방에서 들어온 진기한 물건을 팔기 위해 호객하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시민들이 넘쳐났을 것 같다. 선거철이 되면, 지지의 호소하는 정치가들의 목청 돋운 연설전도 치열했을 듯싶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무고를 당해 사형을 받기 전까지 소크라테스가 시장 골목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토론을 하던 곳도 아고라였다. 그에게 아고라는 학교이자 교실이었다. 철학과 학문, 문학을 싹 틔운 곳도 바로 아고라였다.

아고라 동쪽 편에 있던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이다. 멀리 뒤로 아크로폴리스의 엘렉테이온 신전의 상부의 모습이 보인다. 아고라는 몇 몇 주춧돌 등 잔해만 남아있고, 아고라에서 북적이던 시민들이 휴식과 오락을 즐기고 철학을 논하던 아탈로스만 덩그라니 남았다. ⓒ박경귀

아고라는 민중의 정치 광장이자 상거래를 위한 시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아크로폴리스가 ‘높은’ 곳에 위치한 이상의 공간이었다면, 아고라는 ‘낮은’ 곳에 현실의 삶의 터전이었다. 아크로폴리스가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이 소통하는 수직적 공간이었다면 아고라는 시민들이 대등한 위치에서 토론하고 격돌하는 수평적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들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고, 혼돈과 좌절을 겪을 때, 신에게 달려가 자신들의 나아가야 할 바를 묻거나 발복(發福)을 기원했다.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라는 삶의 두 공간은 그리스 문명을 이끈 수레바퀴의 두 축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아크로폴리스에는 워낙 중요한 유적들과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산재하여 한 번에 다 살펴볼 수가 없다. 앞으로 각 유적에 대한 개별적인 탐색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어 전개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도 서둘지 말고 천천히 아크로폴리스의 진수를 느껴보시기 바란다. 다음 회에는 아크로폴리스 위의 신전들을 하나하나 탐색할 예정이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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