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③>신들과 민중들의 소통 공간
아테네 시 정중앙에 위치 그리스 문명의 2개의 축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고대 그리스를 생각할 때, 아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아고라가 아닐까싶다. 그리스 문명의 대명사가 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kropolis)와 아고라(Agora)는 그리스 문명의 특질을 가장 잘 나타내는 유적이다. 그리스 문명의 모든 것이 응축된 공간이자, 문명의 상징인 셈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도 제 각각 크고 작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갖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가 조성된 역사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대개 미케네 시대, 즉 기원전 16세기에서 12세기에 이미 조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오랜 역사다. 미케네 시대에 한 때 왕궁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에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에 의해 잠시 왕궁으로 쓰였지만, 그 이후 아크로폴리스는 공동체의 숭배를 받는 신역(神域)이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높다'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아크로(akros)'의 어원이 말해주듯 높은 곳에 위치한 폴리스, 곧 성채이자 수호신들이 거주하는 국가의 성소(聖所)였다. 또 시민들의 정신적 위안소이자, 마지막 피난처이기도 했다.
동방의 세계에서 제왕의 궁전을 중심으로 성채가 조성된 것과 사뭇 다르다. 아크로폴리스는 왕의 궁전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의 종교적 성지였던 것이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인의 자유정신과 종교의식을 대변한다. 아크로폴리스에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파르테노스( Athena Parthenos, 아테네 처녀신)’ 신전을 세운 이유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지형적으로도 아테네 도시 정중앙에 위치하여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해발 150여 미터의 석회암 동산이지만 평지 가운데 우뚝 솟아있어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아테네 도심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크로폴리스는 서쪽에서 올라오는 언덕을 빼고 3면이 자연 절벽과 방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다. 아테네인들이 이곳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든 이유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필자는 아크로폴리스의 지형 상 특징 및 방벽의 군사적 효용을 파악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주변을 도보로 돌았다. 멀고 힘든 일이었다. 중간 중간을 건너 뛰어 중요지점을 중심으로 돌기도 했다. 또 나중에 아크로폴리스에 위로 올라갔을 때 역시 동서남북 사방의 전경을 확인하며 위 아래에서 조망하면서 느꼈던 소회를 대조해 볼 수 있었다.
아크로폴리스가 동서남북의 위, 아래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다양한 느낌을 준다. 왜 이들은 이토록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해야만 했을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의 노역이 투입되었을 것인가? 고대의 생존방식은 불가피하게 성채를 요구했을 것이다. 아티카 전역의 농촌지역과 아테네 중심의 시가지로 이루어진 아테네는 주변의 침입에 대한 최후의 방어지로 아크로폴리스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페리클레스가 연 아테네의 황금시기엔 아크로폴리스는 더 이상 아테네인만의 성소가 아니었다.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자 자부였을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크로폴리스에 수많은 신전을 복원하고 방벽을 정비하였던 이유도 그리스의 영광을 영속화하려는 자부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과욕이 지나쳐 제국주의의 길로 빠지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아크로폴리스의 축조 목적은 방어적 목적이 더 강했다. 이후 종교적 성격이 덧붙여졌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신전을 비롯하여 여러 신전들이 아크로폴리스 정상의 넓은 공간을 채우게 된다.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바로 아크로폴리스가 신들의 공간으로 변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다. 참주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대한 숭배가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정상의 공간이 동서의 길이가 270m,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이 156m에 이를 정도로 작지 않다. 특히 동북쪽에는 특별한 건물을 배치하지 않고 빈 공간으로 두어 작은 광장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석회암 산정인지라 평지가 아니라 울통불퉁 바위투성이다. 현재 그리스 국기가 휘날리는 주변이다. 아크로폴리스는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신전을 둔 종교와 정치의 공간이다.
아크로폴리스는 국가의 전란 시에는 최후의 방어거점이 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3차 침입시기에는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 섬으로 소개(疏開)된 이후, 아크로폴리스에 잔류한 수백 명의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의 수만 명과 대적하기도 했다. 워낙 험준한 방벽으로 둘러싸여 한동안 페르시아 군이 고전했다. 가까스로 북쪽 절벽 틈 사이로 난 샛길을 찾아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파르테논 신전과 모든 시설물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필자는 페르시아 군이 찾아낸 비밀 통로를 확인하지 못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무기고 및 군대의 필수 시설도 일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를 보면, 기원전 404년 30인 참주정치 시기엔 집권파 3000인을 제외한 모든 시민의 무기를 압수하여 아크로폴리스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고대 국가 시기에 너비 500여 미터 길이 700여 미터의 꽤 넓은 공간에 3면에 주랑이 들어서 있었다니 규모가 볼 만 했을 듯싶다. 하지만 현재는 주변의 도시화가 진전되어 당시의 큰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광장 동편에 1950년대에 재건되어 현재는 아고라 박물관으로 쓰이는 빨간 지붕의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이 미약하나마 옛 경관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테네 전성기의 아고라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시장을 오가는 수많은 시민들, 여러 동맹국과 동방에서 들어온 진기한 물건을 팔기 위해 호객하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시민들이 넘쳐났을 것 같다. 선거철이 되면, 지지의 호소하는 정치가들의 목청 돋운 연설전도 치열했을 듯싶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무고를 당해 사형을 받기 전까지 소크라테스가 시장 골목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토론을 하던 곳도 아고라였다. 그에게 아고라는 학교이자 교실이었다. 철학과 학문, 문학을 싹 틔운 곳도 바로 아고라였다.
아고라는 민중의 정치 광장이자 상거래를 위한 시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아크로폴리스가 ‘높은’ 곳에 위치한 이상의 공간이었다면, 아고라는 ‘낮은’ 곳에 현실의 삶의 터전이었다. 아크로폴리스가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이 소통하는 수직적 공간이었다면 아고라는 시민들이 대등한 위치에서 토론하고 격돌하는 수평적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들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고, 혼돈과 좌절을 겪을 때, 신에게 달려가 자신들의 나아가야 할 바를 묻거나 발복(發福)을 기원했다.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라는 삶의 두 공간은 그리스 문명을 이끈 수레바퀴의 두 축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아크로폴리스에는 워낙 중요한 유적들과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산재하여 한 번에 다 살펴볼 수가 없다. 앞으로 각 유적에 대한 개별적인 탐색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어 전개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도 서둘지 말고 천천히 아크로폴리스의 진수를 느껴보시기 바란다. 다음 회에는 아크로폴리스 위의 신전들을 하나하나 탐색할 예정이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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