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배경으로 이주노동자 문제 건드려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 수상
<수백억대 투자금이 투입된 영화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선한 스토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작지만 알찬 영화들이 있습니다. 많은 스크린에서 관객들과 만나지는 못하지만, 꼭 챙겨봐야 할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한 번만 더 파도를 타게 해주세요."
제주에서 외국인 불법 취업 브로커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 2세 김수(곽민규 분). 폭력전과로 출소한 후 사회봉사로 해안을 청소하다가 바다 위에서 서핑하고 있는 서퍼들의 모습에 풍덩 빠진다. 쓰레기통에서 우연히 부러진 보드를 주운 그는, 그것을 테이프로 붙이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퍼 해나(김해나 분)는 수에게 서핑을 배워볼 것을 권유한다. 수는 해나의 말에 따라 서프숍을 운영하는 똥꼬(민동호 분)와 해나에게 서핑을 배우게 된다.
독립영화에서 청춘을 소재로 한 작품은 많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파도를 걷는 소년'은 기존 청춘 영화와는 결이 다르다. 최근 이슈가 된 이주 노동자 문제와 서핑, 청춘을 조화롭게 다뤘다.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각각의 소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점이 신선하다.
영화는 이주 노동자 2세이자 방황하는 청춘인 수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수가 브로커 일을 하는 사연, 그가 서핑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을 그리는 방식도 비슷하다. 마음을 열지 않았던 수가 서프숍 사람들과 서서히 친해지고 어울리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본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이야기가 '리얼'처럼 느껴진다. 그 흔한 큰 사건 없이도 영화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땅에 발붙인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연출의 힘이다.
영화 속 이주노동자 문제는 제주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사안이다. 이주노동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탓에 이주 노동자 2세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는 지표로 잡히지도 않는 이주 노동자 2세 문제를 사회가 언제까지 간과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사회 문제를 다루긴 하지만 마냥 무겁진 않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특유의 여유로움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길 잃은 수가 서핑에 오롯이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제주 바다가 주는 위안 덕이다.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배우 곽민규, 드라마에서 지평을 넓히고 있는 신인 배우 김현목은 청춘의 모습을 입체감 있게 그려냈다. 주인공 곽민규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청춘인 '수', 그 자체로 빛난다. 흠잡을 데 없는 연기 덕에 몰입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는 이 영화로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장평경쟁부문 남자 배우상을 수상했다. 둘 외에도 영화 속 모든 배우가 실제 인물처럼 영화에서 생생하게 날아오른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만든 최창환 감독이 연출했다. 영화의 시작은 '파도 타는' 부분이 빠진 학교 밖 소년들 이야기였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16, 17살 아이들이 주먹질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겪는 혼란을 영화로 기획하려고 했다.
최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고 만드는 1년 동안 제주에서 살며 제주가 주는 느낌을 담으려고 애썼다. 많은 서퍼를 만난 그는 실제 서핑도 배우면서, 삶의 태도를 바꾸는 서핑의 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최 감독은 "사회와 청년에 대한 관심을 영화에 담으려 했다"며 "이번 영화를 통해 도시 출신인 내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제주민들의 마음과, 예상치도 못한 자연의 위대함을 제주도에 살면서 경험하게 됐다"고 밝혔다.
영화의 결말은 청춘의 성장을 상징한다. 브로커 일을 관둔 수는 제주에 정착하지 않고 엄마가 있는 중국 하이난으로 떠난다. 서프숍 친구들 덕에 엄마를 찾아갈 용기를 얻었다. 파도를 타며 희망의 빛을 온몸으로 만끽한 수. 관객들은 말한다. 영화를 보고 서핑을 배우고 싶어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