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속 노동 위기에
진보·보수 넘어 생산적 논란 계속
기본소득이 최근 다시 화두로 떠오른 건 4차 산업혁명이 속도를 높이면서다. 자동화·무인화와 함께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기본소득 논의를 가속했다.
기본소득 논란의 특징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분명히 성장과 분배에 관한 논제임에도 다른 사회적 의제와 달리 찬반 모두 이분법적 논리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지향하면서 그 방법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한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시대적 위기의식이 이념적 대립이 아닌 생산적인 방향으로 논의를 이어가게 한다고 설명한다.
“기본소득 역할은 노동으로부터 자유”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은 노동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를 강조한다. 기본소득이 단순 사회보장 차원의 분배를 넘어 위기의 노동을 대신하는 개념까지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기본소득은 단순 복지 수당과 차별성을 둔다.
미국 작가 티머시 로스코 카터는 기본소득을 ‘영구적인 파업을 가능하게 하는 기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어떤 형태의 협상에서 협상을 그만두고 떠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기 마련”이라며 “자본가들은 노동자보다 (협상 테이블을)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협상은) 영원히 불공평한 싸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이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자유를 제공하고 권리를 지킬 수 있게 하는 도구라는 의미다. 같은 맥락으로 기본소득이 ‘나쁜 노동’을 줄여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노동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다 불이익을 받더라도 기본소득이 생계유지를 가능하게 하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다.
이다혜 서울대학교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2019년 발표한 ‘기본소득에 대한 노동법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불안정 노동이 상시화된 환경 속에서 다수의 근로자는 어떠한 형태로든 노동의 목소리를 내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고용에 대한 불이익이 두려워 조합 활동을 주저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소득을 받을 경우 일하지 않아도 수입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근로자가 부분적으로나마 고용불안의 염려를 덜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더 자신 있게 단결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확보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배근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기본소득과 노동을 20세기와 21세기 산업 변화로 설명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20세기는 노동과 자본, 토지가 주요 생산요소였다면 21세기는 데이터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앞으로 전통 제조업은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결국 경제와 사회의 성장은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렸다.
최 교수는 “결국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많은 사회가 성장하는 사회가 된다”며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려면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임금도 적어진다는 점이다. 최 교수는 기본소득이 노동시간 축소로 줄어든 임금을 보충해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데이터 시대에 생산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많은 노동시간이 생산성을 보장해주는 시기는 지났고 기본소득은 혁신을 위한 시드 머니(seed money)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이라며 “복지제도로 기본소득이 논의되던 것은 과거 개념이며 지금은 경제 혁신 정책의 일환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효율성? 기존 복지 손질이 낫다”
이처럼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이 그 기능과 역할에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가운데 반대론자들은 효율성을 강조한다. 기본소득 도입보다 기존 복지제도의 손질이 낫다는 주장이다. 일부는 기본소득이 기존 사회제도와 충돌을 빚고 결과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양재진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기본소득이 복지급여보다 소득보장 효과, 소득재분배 효과, 소비증대 효과 등이 현격히 떨어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기본소득제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은 허구라는 게 양 교수 주장이다.
그는 “5200만 국민이 n분의 1로 나눠 가지면 개인이 수령하는 급여(기본소득)는 턱없이 낮을 것”이라며 “(현 복지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사각지대 해소는 급여 수급 조건을 완화해 기존 복지제도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홍경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본소득제는 전혀 새롭지 않은 제도이고 시대변화와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너무 단순하게 접근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제를 포함한 사회복지제도 핵심기능을 주로 재분배와 관련해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소득계층 사이의 재분배에서 위험집단들 사이의 사회위험 분산으로 발전해온 그간의 경과는 물론이고 그러한 발전의 의미와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노동의 감소 위기’를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노동·경제 연구단체인 ‘아인 랜드의 객관주의 서울 연구회’ 제레미 키더 대표는 “인간 역사에서 기술은 일자리 숫자를 줄인 적이 없다”며 “명백한 사실은 인류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도 기술의 발전은 일자리의 다양성을 증가시켰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키더 대표는 “로봇이나 기술은 일자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며 “일을 하는 생산성이 있어야 기술과 일자리가 나온다. 기본소득제는 이러한 기본 원리를 파괴해 오히려 기술 발전을 막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론은 ‘충분한 돈’…막대한 재원 조달이 핵심
이처럼 전문가들이 기본소득 역할과 효율성을 놓고 논쟁을 펼치는 데는 결국 재원 마련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깔려 있다. 재원은 한정돼 있고 제도 시행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대 입장에서는 기본소득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충분한’ 돈을 제공해야 하는데 현재의 한정된 재원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더라도 ‘푼돈’에 그쳐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상이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기본소득 비판’이란 책을 통해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한정적 재원을 두고 보편적 복지국가 노선과 재정적으로 경합하고 충돌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기본소득 담론 핵심은 사회구성원 모두의 실질적 자유 구현인데 실질적 자유가 구현되려면 물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하고 물질적으로 자유로우려면 6가지 원칙(보편성·무조건성·개별성·정기성·현금성·충분성)이 지켜져야 한다”며 “충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푼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조성혜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 역시 “고용보험도 여러 사업에 사용되면서 지출이 많은 상황이지만 그나마 보험료를 걷어 충당되고 있다”며 “현재 기본소득은 기여금이 없는 데도 지원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공공부조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공공부조의 기본 원칙은 자활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공부조는 목적을 달성하면 지원을 중단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이러한 성격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지적에 기본소득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재원 마련으로 크게 3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다. 기존 예산을 아끼는 재정지출구조 변경과 세금을 더 걷는 증세, 그리고 공유부라는 새로운 형태의 세금이다.
공유부는 누가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따지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의 성과로 귀속시킬 수 없는 수익을 말한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토지와 공기, 물은 물론 인류가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지식 등이다.
이런 공유부를 사적으로 보유하거나 사용하는 데서 발생하는 초과수익을 국가가 세금으로 환수해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는 방안이다. 미국 알래스카에서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익을 모든 주민에게 배당금 형태로 지급하고 있는데 우리 경우 탄소세, 로봇세 등이 거론된다.
박양진 기본소득국민운동대전본부 상임대표는 “기본소득 재원은 조세저항이 없는 새로운 과세 대상을 발굴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며 “로봇 또는 인공지능으로 인한 이익에 대한 과세, 디지털 데이터 이용에 대한 디지털세, 탄소 배출을 많이 하는 기업에 대한 환경세, 부동산 개발로 인한 과도한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등”이라고 말했다.
애초 기본소득 제도가 많은 재정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기존의 복지 체계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본소득이 기존 선별복지와 비교해 특별히 많은 재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개인별로 정부에 내는 세금과 정부로부터 받는 돈을 계산해 볼 때 선별복지나 기본소득 사이의 차이가 거의 없고, 오히려 기본소득이 복지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행정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보수 성향 전문가들도 기본소득에 대해 찬성하는 이유가 그들은 이 제도가 행정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 현재의 재분배정책과 관련된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라며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금액을 지급함으로써 도움을 줄 대상을 선정하고 실제로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낭비를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본소득③] 핀란드·스페인·독일…세계는 실험 중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