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 스타일의 경형 SUV…침체된 경차 시장에 활력소 기대
국내시장 규모 한계상 소형 SUV와 판매간섭 가능성도
GGM 임단협 유예 풀리는 5년뒤 노조 강성화 '위기요인'
현대자동차의 경형 SUV ‘캐스퍼’ 출시가 임박하면서 국내 경차 시장의 판도 변화가 예상된다. 그동안 3종으로 한정됐던 경차 선택권이 다양해지면서 침체 일로의 경차 시장에도 활기가 돌 전망이다.
다만 성장세가 멈춘 국내 자동차 시장의 한계상 기존 차종들과의 판매간섭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와, 현대차의 경차 부활을 가능케 한 광주글로벌모터스(GGM)의 ‘반값임금 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등은 위기요인으로 지목된다.
현대차는 지난 1일 경형 SUV ‘캐스퍼(CASPER)’의 외장 디자인을 공개했다.
캐스퍼는 전장 3595mm, 전폭 1595mm로 모닝, 레이(이상 기아), 스파크(한국GM)와 동일하게 경차 기준을 충족시켰다. 대신 전고는 1575mm로 모닝‧스파크(1485mm)보다 높은 SUV의 비례를 구현했다.
배기량도 경차 기준에 맞춰 1000cc 미만으로 운영된다. 1.0 MPI 가솔린 엔진이 탑재된 기본 모델과 1.0 T-GDI가 탑재된 액티브 모델(터보 모델)로 구성된다.
한국판 짐니?…경차 시장 다양성 충족시켜줄 기대주
캐스퍼의 가장 큰 특징은 SUV 스타일의 디자인이다. 가격과 연비, 실용성 외에 딱히 내세울 게 없었던 기존 경차들과 달리 캐스퍼는 소비자의 소유욕을 자극할 만한 외양을 갖췄다. 더구나 국내에서 높은 선호를 받는 SUV로 분류된다는 게 강점이다.
그동안 국내 소비자들은 SUV 스타일의 스즈키 짐니(Jimny), 스포츠카 스타일의 혼다 S660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경차가 판매되는 일본처럼 우리도 경차 라인업을 다양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을 제기해 왔다.
캐스퍼의 전고는 박스형 경차인 레이(1700mm)보다는 낮지만, 충분한 지상고(바닥에서 차체 하부까지의 높이)를 확보해 한층 터프한 모습이다. 디자인도 작지만 역동적이고 개성 있게 뽑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차 시장의 다양성을 일부나마 충족시킬 수 있는 차종이다.
가격도 경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수준으로 책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아직 캐스퍼의 가격을 공개하진 않았으나 기존 경차 중 가장 비싼 레이(1275만~1580만원)와 소형 SUV 중 가장 저렴한 베뉴(1689만~2236만원) 사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서는 캐스퍼 기본형이 1400만~1500만원, 터보엔진을 장착한 액티브 모델이 1600만~1700만원 수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차 영업사원이나 대리점 입장에서도 캐스퍼의 존재는 반갑다. 생애 첫 차 선택지를 넓혀줌으로써 재구매 고객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 한 영업사원은 “그동안 현대차 영업맨은 경차를 보유한 기아나 한국GM에 비해 핸디캡을 감수해야 했다. 국내 소비자들은 처음 접한 브랜드를 나중에 상위 차급으로 갈아탈 때도 계속해서 선택하는 경향이 많은데, 현대차는 경차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캐스퍼 판매가 시작하면 고객 확보 차원에서 유리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시장 파이 늘려줄까?…상위 차급 소형 SUV 잡아먹을 수도
물론 캐스퍼의 등장이 국내 시장에 무조건적인 긍정 요인만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할 수는 없다.
국내 자동차 시장은 사실상 성장을 멈췄다. 이미 국민 2명 당 1명꼴로 자동차를 보유한 상태에서 시장이 더 늘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처럼 한정된 시장에서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한다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캐스퍼가 자동차 업계의 전체 파이를 늘리기보단 기존 경차들이나 심지어 상위 차급인 소형 SUV 시장까지 일부 잠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1000만원 중반의 예산을 손에 쥔 소비자들이 예전에는 모닝, 레이, 스파크에서 만족하거나 조금 더 무리해서 소형 SUV나 준중형 세단을 선택해야 했다면 앞으로는 고민이 필요 없는 선택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구매 범위를 현대차 내부로만 놓고 본다면 베뉴를 구매할 소비자가 캐스퍼로 타깃을 바꾼다면 회사 입장에선 오히려 손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현 국내 자동차 시장 상황상 새로운 차종이 기존 차종과 충돌 없이 파이만 늘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결국 시장 나눠먹기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국GM이 현재 창원공장에서 생산 중인 스파크를 장기적으로 제너럴모터스(GM)의 차기 글로벌 CUV로 대체할 경우 경차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 완충 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GGM 반값 임금 언제까지?…강성노조 등장시 '뜨거운 감자'
업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바로 캐스퍼를 위탁생산하는 GGM이 계속해서 반값임금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다.
현대차가 지난 2002년 아토스 단종 이후 경차를 판매하지 않았던 것은 수익성을 맞출 수 없는 임금구조 때문이었다.
평균연봉이 9000만원대에 달하는 임금구조상 1000만원 내외의 경차를 팔아서는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었다. 심지어 경차보다 비싼 소형 세단 엑센트 역시 수익성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연봉수준이 비슷한 기아 역시 같은 이유로 모닝과 레이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않고 협력사와 합작으로 설립한 동희오토에 위탁해 생산하고 있다.
그런 현대차가 다시 경차 부활을 결정한 것은 GGM의 이른바 ‘반값임금 체제’ 덕이었다. 광주광역시가 최대주주, 현대차가 2대주주로 참여해 설립한 GGM은 평균 초임을 3500만원으로 완성차 업체에 비해 크게 낮춘 대신 광주시가 각종 복지 등을 제공하는 방식의 상생형 일자리로 출범했다.
이 체제가 계속 유지된다면 현대차의 경차 라인업 운영도 순항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확신할 수 없다.
광주시와 노동계는 GGM 출범 당시 ‘5년간 임금‧단체협약(임단협) 유예’ 조항을 만들어 이 회사의 임금 안정성을 어느 정도 담보했다. 현대차가 캐스퍼 생산 위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던 것도 이 조항이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하지만 그 이후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GGM 근로자들이 임단협 유예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반값임금이나마 안정적 일자리를 구했다는 데 만족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존 완성차 업체들과의 형평성을 거론하며 임금 대폭 인상을 요구할 수도 있다.
5년은 통상적인 신차의 라이프사이클이다. 신차 출시 후 5년이 지나면 디자인이나 성능, 사양 등이 노후화되면서 상품성은 떨어지고 보통 그 타이밍에 완전변경(풀체인지) 모델이 나와야된다.
이 시점에 노조가 고임금을 요구하고, 현대차가 후속모델 투입 없이 위탁생산계약을 종료한다면 GGM은 노사 상생 모델이 아닌 최악의 실패 사례가 될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GGM은 독립적인 회사고, 현대차 외의 다른 회사의 물량을 수주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다른 공장들도 물량이 없어 놀리는 상황에서 GGM에 물량을 위탁할 또 다른 사업자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국내에 연고가 없는 해외 업체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GGM 근로자들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에 가입해 상급단체에 힘을 등에 업고 옥쇄파업을 벌이거나 법적 공방에 나설 수도 있다. 이미 완성차 업계는 사내하청 근로자들의 정규직화 요구와 함께 이뤄진 소송전과 정치권의 압박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있다.
사업을 진행할 때는 아무리 합법적이고 제도적으로 보장된 방식이었다고 해도 소송에서 법원 판결 한 번이면 모든 게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완성차 업체들은 뼈저리게 경험했다.
현대차는 이같은 점을 감안해 GGM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단순 투자자로서의 지위를 강조하며 거리를 두고 있지만, 상황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지금은 21%의 지분을 보유한 광주시가 최대주주고 현대차는 19%의 지분을 가진 2대주주지만 GGM 설립을 주도한 이용섭 광주시장의 임기는 내년 6월까지다. GGM의 임단협 유예 기간이 끝나는 시점까지 광주시장이 최대 두 번 바뀔 수 있다.
그 시점에 광주시를 이끄는 시장이 과도한 비용 투입을 이유로 GGM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지분을 처분해버린다면 졸지에 현대차가 최대주주가 된다.
현대차는 지금도 3만6000여명에 달하는 고임금의 생산직 근로자들이 부담스런 존재다. 전기차 전환으로 인력 수요는 감소하지만, 인위적 구조조정은 불가능하고 퇴직에 따른 자연 감소에만 기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9000여명의 새로운 생산직 근로자를 떠안는다는 건 현대차로서는 악몽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노동계의 사례를 볼 때 5년 뒤 임단협 유예 조항에서 풀린 GGM의 근로자들은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면서 “특히 별도의 오너가 있는 회사도 아니고 시장의 성향에 따라 불확실성이 큰 지자체가 최대주주라는 건 상당한 리스크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