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만에 원칙론 접은 금융위
대선 앞두고 정치권 압박에 '무릎'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 이후 시행돼 온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를 또 다시 추가 시행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해당 정책을 예정대로 다음 달에 종료하겠다며 관계 당국의 수장인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원칙론을 들고 나온 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뚜렷한 연착륙 대책 없이 계속되는 대출 미루기로 금융권의 잠재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거세지는 정치권의 입김이 부작용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23일 금융위에 따르면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의 기한 연장 계획이 다시 마련된다. 이는 여·야 합의로 소상공인 및 방역 지원을 위한 추가경정 예산안이 의결·확정된 데 따른 결정이다. 국회는 추경 예산안을 의결하면서 전 금융권의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의 재연장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는 내용의 부대의견을 제시했다.
금융당국은 이미 관련 조치의 만료 시점을 세 번이나 연장한 상태다. 2020년 9월과 지난해 3월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이르기까지 매번 6개월씩 기한을 늘여 왔다. 이로써 코로나19 국면 초반부터 시작된 금융권의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는 이미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금융위에 따르면 코로나19 금융지원이 시행된 2020년 4월 이후 지난해 11월 말까지 해당 조치가 적용된 대출은 총 272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유형별 지원총액은 만기연장이 258조2000억원, 원금유예가 13조8000억원, 이자유예가 2354억원이다.
혼란만 키운 금융당국 수장
금융권에서도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에는 공감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인 출구 전략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출 상환을 이대로 계속 미룰 경우 임계점에 도달한 리스크가 한 번에 폭발하면서 더 큰 위기를 맞게 될 수 있다는 염려다.
실제로 지난 달 금융위가 개최한 소상공인 부채리스크 점검 금융권 간담회에서 서정호 금융연구원 부원장은 "대출만기 연장, 원리금 상환유예 등 금융지원 조치가 장기화하면, 한계 차주의 도덕적 해이는 물론 금융기관 부실 초래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김영일 나이스평가정보 리서치센터장 역시 "코로나19 대응 금융지원 정책은 정상화하되, 회복지연 업종과 피해 소상공인 등에 대해서는 유동성 지원 등 맞춤형 지원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더욱 문제는 상황을 컨트롤해야 할 금융위원장의 메시지마저 오락가락하며 시장의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고 위원장은 지난 달 중순까지만 해도 "대출 만기연장과 상환유예 조처를 올해 3월 말에 종료한다는 원칙하에 대응 방안을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을 두고 자영업자 등의 우려가 커지자 금융위는 이번 달 초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의 다음 달 종료 여부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정책 종료는 코로나19 방역 상황과 금융권 건전성 모니터링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란 설명을 덧붙였지만, 혼선을 잠재우기에는 원론적 해명에 그친 수준이었다.
금융권에서는 결국 정치권의 논리에 당국이 흔들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민심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여·야가 합심해 코로나19 대출 지원 연장을 압박하고 나서자 끝내 백기를 들었다는 얘기다.
금융권 관계자는 "당국이 시장을 향해 보여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불확실성을 제거해 주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금융위가 대선 이슈에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가 되면서 코로나19 대출 지원을 둘러싼 리스크만 더 키운 꼴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