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제네시스 출범 당시 '럭셔리카 시장 안착 가능할까?' 비관적 시각
출범 6년차에 年20만대 돌파...11년 걸린 렉서스보다 빨라
벤츠가 비웃은 UAM 비전, 조기 상용화 위한 적극 행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당시 부회장)이 2015년 11월 4일 서울 동대문플라자에서 열린 '제네시스' 브랜드 런칭 미디어 설명회에서 브랜드 런칭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현대자동차
2015년 11월 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 나아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국내 첫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의 출범이었다.
행사의 호스트는 ‘정의선 부회장’이었다. 지금은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현대차그룹과 동일인으로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총수이자 회장이지만, 그때만 해도 ‘수석’자도 안 붙은 그룹 내 여러 부회장 중 한 명이었다. 소속과 직책도 현대차그룹이 아닌 현대차의 기획 및 영업담당이었다.
정몽구 회장이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아직 경영권을 물려받지 못한 후계자 정의선의 무게감은 지금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런 그에게 현대차그룹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럭셔리카 시장 진출을 공식 선언하는 중책이 맡겨졌다.
브랜드 론칭을 선언하는 상징성을 가진 행사의 호스트는 단지 얼굴마담이 아니다. 정몽구 회장은 단지 행사 주관이 아니라 제네시스의 미래를 후계자에게 맡긴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당시 현대차의 도전을 마냥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2차 산업혁명 시대부터 업력을 쌓아온 메르세데스-벤츠나 BMW 정도나 돼야 럭셔리카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들보다 조금 늦은 아우디도 럭셔리 브랜드로 인정받기 위해 수십 년을 노력해야 했고, 아시아권 선두주자인 토요타도 렉서스를 ‘연 20만대’ 브랜드로 안착시키는 데 10년 넘게 걸렸다.
가뜩이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길을 가는데, 그걸 주도하는 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기업의 수장도 아닌 젊은 2인자라니, 제네시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미더움이 담기긴 힘들었다.
실패에 따른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2인자에게 맡긴 걸까. 어차피 상위 두 개 차종만 내놓고 기존 에쿠스와 제네시스(브랜드 출범 이전의 차명) 판매량만큼만 유지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 안전하게 가겠다는 것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45세 정의선’의 포부는 컸고, 표정은 자신에 차 있었다. 부친과 함께한 자리에서 종종 보이던 겸손한 표정과 공손한 태도는 이날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네시스 브랜드 론칭은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고급차 시장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 추가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차 브랜드를 육성해 세계 유수의 브랜드와 글로벌 고급차 시장에서 보다 당당하게 경쟁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네시스 브랜드 라인업에는 쇳물에서 자동차까지 모든 과정에서 현대자동차그룹 전 계열사의 핵심 기술이 유기적으로 집약됐습니다.”
그는 세계 시장에서 벤츠, BMW 등 럭셔리 시장의 터줏대감들과 정면 대결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이를 위해 그룹 차원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고도 했다. 결코 ‘안전한 길’을 걷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을 위한 준비는 오래 전부터 이뤄졌었다. 2013년 11월 출시된 제네시스 2세대 모델 개발 과정에서 정의선 당시 부회장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에 위치한 주행시험장과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수시로 오가며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그가 연구원들에게 남긴 주문은 “유럽의 향기가 담긴 차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기존 현대차의 고급차 라인업의 특성이자, 제네시스보다 먼저 럭셔리카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렉서스의 특성인 ‘푹신하고 부드러운 승차감’에서 벗어나 다이내믹한 주행 퍼포먼스를 이식하라는 의미였다. 그 특성은 지금까지 제네시스 브랜드 차종들의 DNA로 전해 내려온다.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 직전에는 럭셔리 브랜드 출신의 거물급 전문가도 속속 영입했다. BMW의 고성능 브랜드 M을 이끌던 알버트 비어만,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 출신 루크 동커볼케, 람보르기니 브랜드 총괄 출신의 맨프레드 피츠제럴드 등 자동차 업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이들이 잇달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네세스의 조기 안착을 위해 럭셔리카 시장에서 성능, 디자인, 브랜드 관리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싹쓸이해온 것이다.
기존 에쿠스와 제네시스(차명) 후속차량 위주로 라인업을 꾸려갈 것이라는 예상도 보기 좋게 깨버렸다. 브랜드 출번 2년 뒤인 2017년 럭셔리카 브랜드로서는 큰 모험일 수 있는 ‘작지만 비싼 차’ G70을 엔트리 차급으로 내놓았고, 2020년에는 SUV 모델인 GV80과 GV70을 잇달아 출시했다. 2021년에는 순수 전기차 모델 GV60까지 출시하며 라인업을 다양화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실질적인 출범 첫 해인 2016년 5만대 판매를 넘어섰고, 이듬해엔 7만대 이상을 팔았다. 럭셔리 브랜드의 시장 안착 여부를 가늠하는 연간 판매대수 20만대를 넘은 것은 6년차인 2021년이었다.
1989년 출범한 렉서스가 연 판매 20만대를 넘기까지 11년(1999년)이나 걸린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다. 제네시스보다 먼저 럭셔리카 시장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혼다 아큐라, 닛산 인피니티 등과는 비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출범 7년 10개월 만인 지난 8월 누적 판매 100만대를 돌파하며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다. 출범 당시 ‘정의선 부회장’을 향했던 못미더운 시선은 거둬들여진지 지 오래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당시 수석부회장)이 CES 2020 개막을 하루 앞둔 2020년 1월 6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 호텔에서 열린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영국 기자
이제 편하게 앉아 성공의 과실을 누렸으면 좋았겠지만, 현대차그룹 전체를 이끌게 된 정의선 회장에게는 더 많은 도전이 남아있다. 성공시킨 제네시스 브랜드를 비롯, 현대차, 기아 등 완성차 3개 브랜드가 전기차 시장에서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미래 모빌리티 사업에서도 성과를 내야 한다.
정의선 회장은 3년 전에도 또 다른 못미더운 시선에 직면해야 했다. 2020년 CES에서 선언한 ‘UAM(도심항공모빌리티)과 PBV(목적기반모빌리티), Hub(환승거점)으로 구성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이다. 정 회장은 2028년에는 UAM이 상용화될 것이라는 예상도 내놨다.
전통적 완성차 제조사로서 UAM 시장을 열겠다는 포부는 많은 이들의 의문을 샀다. 올라 칼레니우스 다임러 AG 및 메르세데스 벤츠 AG 이사회 이사장은 정 회장의 발표 이후 불과 몇 시간만에 진행한 기조연설에서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2020년 하늘을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면서 정 회장의 포부를 비웃었다.
칼레니우스 이사장은 “물론 하늘을 나는 이동 수단이 이미 존재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같은 이동수단을 표준적인 이동수단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거리감이 있다”며 UAM의 사업성을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정 회장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 출신 신재원 사장을 영입해 UAM 개발 전담 조직을 만들었고, AAM(미래항공모빌리티)으로 개념을 확장한 2021년에는 미국에 AAM 독립법인 ‘슈퍼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신수도에서 AAM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현지 기관과 업무협약도 체결하는 등 ‘하늘을 나는 이동수단’ 상용화를 위한 정 회장의 발걸음은 빠르다.
제네시스에서 이룬 성공이 현대차 도약의 계기였다면, AAM의 성공은 국가적 미래 먹거리 확보라는 거시적 경사가 될 수 있다. 이번엔 정 회장을 향한 못미더운 시선이 더 빨리 거둬들여지길 기대한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