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빅5 병원'서 20년 재직한 저명한 의사…정부와 의사 모두 비판하면서 '공공의료' 강조
운동권 출신 자녀들 특혜 의혹 있었던 공공의대 설립과는 궤 달리해…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생각하는 국민들, 의대 정원 확대에 호의적…야권 '총선 포퓰리즘' 공세
의료의 상품화 우려 및 낮은 수가, 과도한 형사처벌 주장엔 귀 기울여야…정부, 대화의 끈 놓지 말아야
설 연휴를 앞두고 한 저명한 의사 선생님과 점심식사 자리를 가졌다. 이른바 국내 ‘빅5 병원’ 가운데 한 곳에서 20년 넘게 재직 중인 그는 작금의 의대 정원 갈등에 걱정이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의사들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잘한 게 없다는 취지였다. 응급실,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는 외면하고 피부과, 성형외과로만 몰려 국민들에게 ‘의사들은 돈이나 벌려는 사람들' 인식을 심어준 잘못이 분명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왕 이렇게 됐으니 의사도 검사나 외교관처럼 아예 국가에서 뽑아 필수의료 위기를 극복하고 이들의 지방순환근무로 지역의료 공백도 메우자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공공의료 기능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2천명 증원 계획을 구현하려면 정부가 당장 지역 의대들에 교수 충원과 실습·연구를 위한 시설 확충에 나서야 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면 현재 배출되는 연 3천명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족히 수백 명은 공공의료 인력으로 바로 선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너도 나도 의사에 미친 나라가 된 게 돈 잘 버는 의사 돼 한 번 뿐인 인생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인데, 그렇게 군대에서 말뚝 박는 것처럼 만들어 놓으면 누가 의사를 하겠느냐고 기자가 되물었다. 국가에서 돈 다 대주면서 공부시킨 후 넉넉한 급여로 15년 정도 의무 복무시킨 다음 개인 개업하게 해주면 아마 서로 하려고 할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몇 해 전, 80년대 운동권 출신 자녀들을 음서제도 비슷한 시혜(施惠)로 거저먹기 의사 만들어주려는 정책이라는 의혹이 쏟아졌던 이른바 공공의대 설립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이 보다는 훨씬 더 엄격하게 뽑아 까다롭게 복무시키되 충분히 배려해준다는 측면에서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체계가 워낙 잘 돼 있어 어떤 관점에서는 공공의료 기능이 성숙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보험체계가 잘 돼 있다는 것은 부자들이 돈을 많이 내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인 만큼 공공의료가 잘 돼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얘기이고, 그렇게 입원 등의 의료수가가 워낙 낮으니 지방에서 잘 치료할 수 있는 병도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숙소가 없으면 입원부터 시켜달라고 떼쓰는 환자들이 부지기수라고 토로했다. 또 공무원처럼 국가에 묶여 있는 의사들이 많으면 이렇게 파업 엄포 때마다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지금의 필수의료 기피 현상은 선의의 의료행위에 대한 과도한 형사처벌 등 규제 일변도의 정책 탓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정부가 이렇게 파격적인 의대 정원 결단을 내리게 된 이유는, 받아주는 응급실을 찾아 기약 없이 길거리를 헤매다 사망에까지 이르는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청소년과가 줄어들면서 소아환자와 보호자가 병원 문을 열기 전부터 길게 대기하는 '소아과 오프런' 등 필수의료 붕괴 상황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실제 20년 가까이 답보 상태인 우리나라 의대 정원(3천58명)은 주요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의사가 부족해 환자는 질문도 못하고 내쫓기는 이른바 ‘3분 진료’가 만연하고 고령화로 의료 서비스 수요가 더욱 늘어날 앞날을 생각하면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터트렸다며 야권은 시비를 걸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역대 정부에서 못한 것을 욕먹을 각오하고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총선용 포퓰리즘, 국민 표심을 겨냥한 정치적 셈법이라는 공세는 식을 줄 모른다.
실제로 정부의 의대 증원을 향한 국민 여론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국민들은 이 나라에 더 이상 어떤 특권을 갖고 무엇인가를 독점하려는 직업군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배타적이다. 아무리 의사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반발해도 결국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의사들이 많아지면 자기들 돈 적게 벌게 될까봐 그러는 것 아니냐는 정서가 뚜렷하다. 변호사도 그렇게 날뛰며 버티다가 결국 많아지니 국민들이 받는 법률서비스의 질이 높아지지 않았느냐는 반론도 다 이런 정서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 하나는 전 국민이 일생에 한 번 쯤은 뼈저리게 경험했다는 ‘대한민국 의사들의 불친절’의 원인을 인력 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천형(天刑)이라고 푸념하며 스스로 놀리는 그들의 업무 강도가 국민들은 막연하게 숫자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 대가로 그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와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언행이 무차별로 뿜어져 나온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별없이 의사들의 숫자만 늘여 놓으면 의료의 상품화는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의사 수를 늘린 일본의 경우 ‘진짜 치과의사 감별법’ 따위의 문구가 무슨 유행처럼 온라인상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떠돌고 있다. 또한 ‘과잉진료’로 대표되는 의사들의 장삿속 돈벌이 행태도 더욱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데, 의사가 불필요한 추가 진료를 통해 수익을 얻으려고 마음먹어도 환자는 의료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자신이 받는 치료가 적정한 수준인지 알기 어렵고 아프다는 가장 나약한 상태의 인간으로서 대부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의사들의 철저한 직업윤리 준수가 선행돼야 방지할 수 있는데 갈수록 그 수법이 교묘해지고 있다고 하니 남의 나라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설 연휴가 끝나면 의사단체들의 총파업 등 집단행동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의대 증원 저지”를 천명한 대한의사협회(의협)은 비상대책위원회 설치를 마치고 투쟁의 선봉장도 뽑았다. 의협 산하 16개 시도 의사회는 오는 15일 전국 곳곳에서 궐기대회를 열 예정이다. 의협이 비대위 체제 전환 후 첫 단체행동이다. 향후 집단행동의 파급력을 키우는 주요 상급종합병원 전공의들까지 대대적으로 참여할 경우 전투열은 가히 정점으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대응도 그 어느 때 보다 수위가 높다. 일단 집단행동에 돌입하면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는데 거부하면 최대 의사면허를 박탈할 수 있다. 여기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라고 하니 한때, 히포크라테스 앞에서 진정 병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의 마음까지 치료하겠다고 맹세했던 우리의 심의(心醫)들은 감옥에 갈 판이다. 물론 이런 소모적인 힘겨루기에 의료시스템이 마비되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들이다. 정부가 불법 집단행동에는 단호히 대처하더라도 결코 대화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국민들의 안전이 담보돼 있기 때문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고, 천직(天職)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묵묵히 자기소임만을 여법하게 수행해 온 의사들도 적지 않다. 대화로 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