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글로벌 조선시장 장악 위해 각종 불공정 수단 동원해
USTR, 中 선사 선박에 美 항구 입항 때마다 수수료 부과
“美 제품, 美 선박 통해서만 수출돼야 한다”는 방안 마련
中, 강력히 반발…“미국의 잘못된 처사 중단돼야 한다”
중국 석유화학 대기업인 헝리(恒力)그룹의 자회사 헝리조선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 있는 조선소에 92억 위안(약 1조 8000억원)을 들여 추가 시설과 직원 기숙사 등을 짓고 있다. 이번 공사를 통해 연내 대형 탱커선과 초대형 컨테이너선 건조 능력을 확보할 전망이다.
한국 STX그룹이 2006년 세운 이 조선소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폐쇄된 채 10여년 간 방치되다 헝리그룹에 인수됐다. 헝리그룹은 2022년 헝리조선을 설립하고 삼성중공업에 기술협력을 요청해 2024년 첫번째 선박을 건조했다. 조선업이 주업종이 아닌 신규 주자임에도 헝리조선은 지난해에 선박 30척 건조에 착수했다.
미국이 중국 조선산업 타격에 본격 나설 태세다. 글로벌 조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중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분쇄’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빅픽처’(큰 그림)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통상정책과 무역협상을 주도하는 미 무역대표부(USTR)는 중국 선사 및 중국산 선박과 관련한 해상운송 서비스에 수수료를 매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지난 25일 보도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중국 선사의 선박은 미국 항구에 입항할 때마다 선박당 최대 100만 달러(약 14억 4000만원) 또는 선박 용적물에 t당 최대 1000달러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중국산 선박을 포함한 복수의 선박을 운영하는 선사는 미국 항구에 입항하는 중국산 선박에 조건에 따라 최대 150만 달러의 수수료 등을 부과하기로 했다.
USTR은 이와 함께 "미국산 제품은 미국 선박을 이용하자"는 취지의 방안도 마련했다.해상으로 운송되는 미국 제품의 최소 1%는 미국 선사의 미국 선박을 통해 수출돼야 한다.시행 2년 후에는 3%, 3년 후 5%, 7년 후 15%로 최소 기준비율이 올라간다. 궁극적으로는 "미국 제품은 미국산 선박을 통해 수출돼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수수료가 예정대로 부과되면 한국 조선업이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통신은 “USTR 조치로 중국 선박의 운송비용이 올라가면 한국과 일본 조선업계에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해운사 입장에선 중국 선박 대신 한국 선박 발주가 수수료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글로벌 ‘빅5’ 선사 대부분이 중국산 선박을 다수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사들이 중국 조선사 발주에 부담을 느껴 한국이나 일본 조선사로 발주가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해운사가 중국 조선소 대신 한국 조선소 문을 두드리고 있다. 조선·해운 전문지인 트레이드윈즈에 따르면 세계 5위 해운사 독일 하파크로이트는 12억 달러 규모의 액화천연가스(LNG) 이중연료 추진 컨테이너선 6척을 중국 조선사 대신 한화오션에 발주하는 계약을 최종 검토 중이다.
이번 추진 방안은 조 바이든 직전 정부가 중국 산업 관행을 조사한 뒤 나왔다. 바이든 정부 당시 USTR은 지난 1월16일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세계 조선·해운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각종 불공정한 수단을 동원해 왔고 미국 경제에 피해를 줬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보고서는 중국 정부가 사용한 불공정 수단으로 ▲자국 기업 금융지원 ▲외국 기업 대상 장벽 강화 ▲강제적 기술이전 ▲지식재산권 탈취 등을 지목하며 이를 막기 위한 ‘긴급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는 “중국 정부가 자국 조선·해운산업 인건비를 의도적으로 낮췄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힘입어 중국은 조선·해양 분야를 지배하겠다는 목표를 지난 30년 동안 대부분 달성했다고 USTR은 평가했다. 캐서린 타이 직전 USTR 대표는 중국이 "공정하고 시장 지향적인 경쟁을 저해하고, 경제 안보 위험을 키우며, 미국 산업에 최대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조선산업은 중국 정부가 주는 각종 특혜·보조금 덕분에 2000년 시장 점유율 5%에서 2023년 50% 이상으로 끌어올려 세계 1위로 도약했다. 경쟁국인 한국(2위·28%), 일본(3위·15%)과의 격차도 크게 벌렸다. 반면 과거 조선업계 선두주자였던 미국의 점유율은 1%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미국은 현재 상업용 선박건조 분야에서 세계 19위로 추락했으며, 한해 5척 미만의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미국의 전성기 때인 1975년의 경우 70척 이상의 선박을 건조했다. 반면 중국은 한해 1700척 이상의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조선·해운산업을 재건하는 데 수십 년과 수천억 달러가 필요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영리 노사협력단체인 미국제조연맹 스콧 폴 회장은 “우리는 중국에 너무 의존적”이라며 “생산능력 증가는커녕 조선 능력이 거의 없다”며 “이는 초강대국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조선 강국 미국이 경쟁력을 잃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국 산업보호를 위한 법 때문이다. 1920년 상선을 대상으로 ‘미국 내에서 건조된 선박에 한해서만 미국 내 해상 운송을 허가한다’고 규정한 ‘존스법’이 대표적이다.
1965년과 1968년에는 미 군함을 겨냥해 ‘미군 선박과 주요 부품은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이 제정됐다. 이 두개의 법으로 인해 미국 조선업계는 해외 업체와 경쟁을 피한 채 안정적인 물량을 수주할 수 있는독점권을 얻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毒)’이 됐다.
미국의 조선소는 전성기에 400여 곳에 달했지만 수주 잔고가 있는 곳은 지난해 기준 21곳에 불과하다. 영국 조선업 시장조사 업체 클라크슨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발주된 선박 2412척 가운데 미국이 수주한 것은 12척(0.5%)뿐이다.
미 해군의 군함 건조와 수리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10년간 구축함 23척을 건조했지만 미국은 11척에 그쳤다. 장거리 임무수행 능력을 갖춘 순양함의 경우에도 중국은 2017년 이후 8척을 건조했지만 미국은 단 한 척도 만들지 못했다. 중국 군함의 70%가량이 2010년 이후에 진수됐지만, 미국 해군은 이 비율이 25%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진행 중인 미 해군 군함 건조 역시 12~36개월 지연되고 있다. 미 해군이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제너럴 다이나믹스 일렉트릭 보트와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가 공동으로 건조하는 컬럼비아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은 12~16개월이 지연됐고, 버지니아급 잠수함 4번과 5번 블록도 각각 36개월과 24개월씩 늦어지고 있다. 오스탈 USA가 건조하고 있는 해양감시선,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의 상륙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미 잠수함의 약 40%가 수리 중이거나 유지·보수를 기다리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 의회에서는 중국의 조선업 견제를 위한 초당적 협력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상원의 마크 켈리(민주·애리조나)와 토드 영(공화·인디애나) 의원, 하원의 존 가라멘디(민주·캘리포니아)와 트렌드 켈리(공화·미시시피) 의원은 지난달 19일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과 항만시설법'(SHIPS for America Act)을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미국 내 선박 건조를 장려하고 조선업 기반을 강화, 미국 선적 상선을 대폭 늘려 '전략상선단'을 운영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특히 외국에서 건조한 상선을 한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미국 정부가 동맹 및 전략적 파트너와 함께 전시에 필요한 해상 수송 능력을 보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한·미 조선 협력의 기회로도 주목받았다.
이에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23일 홈페이지에 대변인 명의로 올린 입장문을 통해 "미국이 잘못된 처사를 중단하기를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상무부는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조사에 들어간) 2024년 3월 이후 중국과 미국은 여러 차례 소통했다"며 "미국이 내놓은 항만 사용료 징수 등 제한 조치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USTR 추진 방안은 오는 24일 미 국제무역위원회(USITC) 공청회 등 절차를 통해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