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나당 전쟁을 통해 당나라마저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숙적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강대한 당나라까지 물러나게 만든 신라의 왕실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절정은 신문왕 때로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장인이자 진골 무장 세력의 핵심인 김흠돌을 필두로 김군관 같은 전쟁 영웅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왕권을 강화한다. 이런 흐름은 서기 765년 6월에 서른여섯 번째 임금인 혜공왕이 즉위할 때까지 이어진다.
혜공왕은 경덕왕의 늦둥이 아들로서 즉위했을 때 나이가 불과 8살이었다. 따라서 그의 어머니인 경수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왕이 어리고 모후가 대신 통치 하게 되어서 그런지 그의 재위는 불안감과 함께 시작된다. 암소가 다리가 다섯 개 달린 송아지를 낳고, 강주에서는 땅이 꺼지고 연못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왕궁에 별이 떨어지고, 지진까지 일어나는 것은 물론 병충해와 가뭄까지 들었다. 그 와중인 서기 768년 7월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일갈찬 대공과 그의 동생인 아찬 대렴이 반란을 일으키는 변괴까지 발생한다.
7월에 일길찬 대공이 아우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나 왕의 군사가 이를 쳐서 평정하고 9족을 베어 죽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반란이라고는 하지만 실체가 애매모호한 사례들이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누명을 씌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과 대렴의 반란은 왕궁을 무려 33일이나 포위할 정도로 강력한 반란이었다. 한 달 넘게 왕궁이 포위되었다는 것은 반란군의 세력이 크다는 것은 물론이고 포위망을 풀 수 있는 진압군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뒤늦게 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짧은 편이지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비교적 긴 기사가 나온다. 왕도와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 각간의 집안이 망하였고, 그의 재산과 보물, 비단 등을 모두 왕궁으로 실어 들였으며 석달 간 이어진 싸움이 끝나고 포상을 받은 사람이 많았지만 반면에 죽은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삼국사기에는 왕궁을 33일간 포위했다가 반란이 진압되면서 끝난 것처럼 나오지만 삼국유사에는 석달 동안 전국의 96각간들이 서로 싸웠다는 다소 상반되고 이질적인 기사가 나온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일단 각간이라는 관등은 신라의 17관등 중에 가장 높은 등급이다. 따라서 같은 시기 신라에 96명의 각간이 있을리는 없고, 이들이 모두 치고 받고 싸웠을 가능성은 더욱 더 희박하다. 거기다 삼국유사에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뉘앙스보다는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기록이 서로 틀리다고 한쪽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일단 대공과 대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서 왕궁을 포위했는데 진압 여부를 두고 전국의 관리들이 서로 의견이 갈려서 싸운 기간이 석달 동안 이어졌다고 연결하면 두 개의 기록이 서로 잘 맞아떨어진다. 이 기록들을 신뢰한다면 반란군이 33일간 왕궁을 포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잘 설명된다. 그렇다면 대공과 대렴 형제는 왜 반란을 일으켰고, 지방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왕실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까지 몰아낸 이후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토사구팽 이벤트를 진행해서 많은 진골 귀족들을 처형했고, 관리들에게 땅을 지급했던 녹읍을 폐지하고 월급을 주는 녹봉을 시행한다. 녹읍은 단순히 땅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의 수확은 물론이고, 노동력과 공물까지 모두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땅의 경작권을 매개로 해서 해당 지역의 주민들도 지배할 수 있다. 중앙 집권체제를 시행하려고 하는 왕에게는 아주 나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문왕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녹읍을 없애버린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경덕왕때 녹읍이 다시 부활한다. 그리고 아마 부활한 녹읍을 둘러싼 갈등이 대공과 대렴 형제의 난, 혹은 96각간의 난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시기는 혜공왕이 10대 초반의 나이가 될 때였다. 어쩌면 혜공왕이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고, 그것에 반발한 결과물이 대공과 대렴 형제의 반란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반란은 한 달, 혹은 석달 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진압당했다. 그 와중에 신성에 있는 창고가 불에 탔지만 대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대공과 대렴 형제의 재산은 물론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의 재산을 압수하는 것으로 손해를 메꿨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대공과 대렴 형제의 반란을 시작으로 2년 후인 서기 770년 8월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했다. 5년 후인 서기 775년 6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도 갔고 시중까지 역임한 이찬 김은거까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역시 목숨을 잃었다. 불과 두 달 후인 8월에는 이찬 염상과 시중 정문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숨을 잃었다. 왕과 함께 국가를 통치해야 할 고위 관등의 귀족들이 줄줄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결국 통치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고, 반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귀족들이 생각이 맞아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혜공왕은 재위 16년째인 서기 780년, 반란을 일으킨 이찬 김지정에 의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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