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승계 집착'이 뒤흔드는 제약·바이오 경쟁력 [기자수첩-ICT]

이소영 기자 (sy@dailian.co.kr)

입력 2025.08.21 07:00  수정 2025.08.21 07:00

전문성이 미래를 좌우하는 제약·바이오

보여주기식에 그치는 전문경영인의 한계

경영권 관련 이미지. AI 이미지

“신약 개발을 위한 고도의 전문성과 냉철한 비즈니스 판단이 필요한 제약·바이오 업계에 왜 유독 ‘가업 승계’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일까.”


제약·바이오 산업을 출입하며 갖게 된 근본적인 물음이다. ‘형제의 난’ ‘내홍’ 등 제약·바이오 산업에서는 아직도 경영권 다툼으로 인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잠깐 다른 산업을 바라보자. IT 공룡 기업인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일찌감치 창업자의 빈자리를 전문경영인이 채웠다. 국내 IT 산업을 이끄는 네이버와 카카오도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착된 지 오래다. 금융권의 경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법적 장치로 인해 산업 자본이 직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유독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이러한 기업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예외인 듯 하다.


간혹 화려한 스펙의 전문경영인을 영입했다는 소식은 기업에 잠시 기대감을 불어넣지만 그들의 역할은 ‘보여주기식’ 혹은 ‘총알받이’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오너 2·3세의 경영권 승계가 본격화되는 시점이면 전문경영인은 후계자의 경영 능력을 돋보이게 할 ‘배경’으로 전락하고는 한다.


최근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경영권 다툼 기사를 취재하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인사철이 되면 전문경영인들은 소위 ‘숨도 못 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적과 주가 등 객관적인 수치가 전문경영인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는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인사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 주주의 결정에 따라 전문경영인은 단번에 짐을 싸야 할 형편에 내몰리고는 한다.


시선을 해외로 돌리면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3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빅파마 머크는 창업 가문이 여전히 대주주로 있지만 경영은 철저히 독립된 전문경영인에게 맡긴다. 이사회는 기업의 장기적인 방향성과 가치를 감독할 뿐 경영 일선에 나서지 않는다. 소유와 경영은 별개의 분야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머크의 경영 모델은 국내에서 가장 시끄러운 경영권 분쟁의 한복판에서 소환됐다. 한미약품그룹 오너 일가는 지난해 OCI그룹과의 통합을 두고 모녀 측과 형제 측이 갈라서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를 장악한 모녀 측은 머크식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너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가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의 진정성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머크식 경영’이 깊은 철학적 고민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경영권 다툼의 승자 측이 권력을 가져갈 새로운 ‘명분’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시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과연 제약·바이오는 ‘물려줄 수 있는’ 사업일까? 하나의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선 10년이 넘는 시간과 수백억, 수천억의 자본, 셀 수도 없이 방대한 데이터와의 싸움이 필요하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규제 당국의 허가까지 모든 단계는 고도의 과학적 전문성과 냉철한 비즈니스 판단을 요구한다. 그 어떤 산업보다도 ‘전문성’이 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분야인 것이다.


기업은 물려줄 수 있으나, 창업주가 가졌던 신약 개발에 대한 절실함도 혈연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계승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분야의 리더 자리를 단지 오너가의 자녀 혹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맡기는 것이 진정 기업을 위한 일일까. K-제약, K-바이오가 진정한 글로벌 리더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끈끈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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