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 표시 제외된 ‘유일한 축산물’
값싼 멸균우유 급증…업계 위기감
소비자 알 권리, 제도는 ‘공백’ 문제
원산지 표시 의무화에 외식업계는 ‘신중론’
서울 시내 한 홈플러스 매장 우유 진열대에 우유가 판매되고 있다.ⓒ뉴시스
최근 유업계를 중심으로 ‘우유 원산지 표시 의무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2026년 미국·유럽산 유제품 관세가 사라지면서 저가 수입품 공세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산 프리미엄 시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더해지며 제도 논의가 빠르게 확산하는 분위기다.
반면 외식업 현장에서는 우유를 사용하는 메뉴·제품이 광범위해 표시 의무가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양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면서 국산 보호와 실무 부담 사이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힐지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현행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 등에 관한 법률(원산지표시법)’에서 음식점이 반드시 원산지를 밝혀야 하는 축산물은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오리고기·양고기·염소고기 등 6종이다. 여기에 배추김치·쌀·콩 등을 포함해 총 9개 품목이 표시 의무 대상이다.
하지만 국산 우유는 연간 생산액 1조 원대에 달하는 주요 축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표시 의무 품목에서 제외돼 있다. 제도가 2010년 도입된 이후 수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우유가 표시 품목에 포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수산물은 20종까지 확대된 것과 대비된다.
이를 두고 낙농육우협회 등 생산자단체는 “2025년부터 수입산 원유 무관세가 적용되면 멸균우유의 가격 경쟁력이 크게 높아져 외식업체와 가공식품 기업이 대거 수입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유업계는 불안감이 크다. 저출산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먹거리 증가 등의 영향으로 국내 우유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서다. 여기에 우유의 원료가 되는 원유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으로 가격 경쟁력을 크게 잃으면서 소비자 외면에 대한 우려가 겹쳤다.
실제로 업황 악화에 따른 유업계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낙농진흥회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우유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2021년 444만8459kg이던 우유 소비량은 2024년 389만4695kg으로 줄었다. 1인당 소비량도 같은 기간 86.1kg에서 76kg으로 줄었다.
우유 소비 감소에도 외국산 우유 수입은 급증하는 추세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3년 외국산 멸균 우유 수입량은 4만6241톤으로 전년 대비 23.8% 늘었다. 5년 전인 2018년(4275톤)과 비교해 보면 10배 가량 증가했다. 연간 기준 사상 최고 수준이다.
외국산 우유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싼 가격 때문이다. 대규모 젖소 목장을 운영하는 폴란드, 호주 등에서 수입하는 우유는 L당 가격이 1500~1600원으로 국내산의 절반 정도다. 국산 우유 가격이 매년 오르는 사이 값싼 외국산 우유가 시장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부터 업계를 둘러싼 상황이 또 한 번 달라진다. 2026년 미국·유럽산 유제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된다면 유업계가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미국산·유럽산 우유, 치즈 등에 대한 관세율은 11~13% 수준으로 매년 단계적으로 하락해 2026년 이후에는 0%가 된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최소한의 차별화 수단으로서 ‘우유 원산지 표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값싼 수입 멸균우유와 국산 신선우유의 품질·신선도 차이를 소비자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원산지 표시이기 때문이다.
원산지 공백의 가장 큰 문제는 소비자가 자신이 마시는 우유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카페 라떼, 아이스크림 등 유제품 활용 메뉴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현재 소비자는 국산 신선우유를 쓰는지, 값싼 수입 멸균우유를 쓰는지 소비자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수입산 멸균우유는 고온 처리로 보관이 용이하지만, 국산 원유 기반 제품과 신선도·영양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원산지 표시가 없을 경우 소비자는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선택하게 되고, 수입 멸균우유가 국산으로 둔갑해 유통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최근 정부는 국내 낙농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국산 우유 소비 확대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빠르게 소비가 늘고 있는 외식·카페 시장에서는 국산 우유 여부를 확인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에서 정책과 제도의 엇박자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유업계 관계자는 “국산 원유 표기는 단순한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소비자가 신뢰를 갖고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라며 “소비자가 현명하게 원산지를 따지고 비교해 선택하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소비자의 알 권리가 존중될 때 건강한 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카페라떼 연출 이미지ⓒ뉴시스
다만 외식업계는 우유 원산지 표기 의무화에 신중한 입장이다. 라떼·밀크티·수프·크림·버터 등 우유가 들어가는 메뉴가 매우 다양해 쓰임세가 많은 만큼, 원재료값 변동에 따라 우유를 수시로 바꾸기 때문에 일일이 원산지를 관리·표기하는 데 현실적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 조사에서도 외식업소들이 원산지 표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난다. 한국소비자원이 프랜차이즈 음식점 80곳을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53.8% 업소에서 원산지 미표시·허위표시 등 부적합 사례가 확인됐다.
음식점 원산지표시제가 처음 확대되던 2008년에도, 중·대형 음식점들이 국·반찬까지 쇠고기 원산지를 모두 표기해야 하면서 메뉴판·게시판을 한꺼번에 손보느라 ‘우왕좌왕’ 했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원산지 표시 품목을 추가하는 방향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규모 카페·빵집까지 메뉴·라벨 전면 수정, 단속·과태료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어 실무 부담을 줄이는 가이드와 단계적 도입이 병행돼야 한다”고 바라보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원산지 표시가 소비자 보호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제조·외식업계의 업무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며 “업종 특성에 따라 표시 기준을 세분화하고, 준비 기간을 충분히 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시장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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