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소송 걸고 독자 활동”…‘탈출 매뉴얼’이 되어버린 가처분 신청
무조건적 ‘연예인 편들기’ 제동… “입증 없으면 계약 유효” 판례의 전환점
최근 뉴진스의 일방적인 전속계약 해지 선언은 엔터 산업의 권력 지형이 바뀌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막강한 팬덤과 자본을 등에 업은 아티스트, 즉 ‘슈퍼을’의 등장이다. 표준전속계약서는 ‘경제적 약자’인 아티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과연 지금의 톱 클래스 아이돌을 ‘약자’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따라왔다.
ⓒ어도어
지난해 뉴진스가 소속사 어도어를 상대로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하며 보낸 내용증명과 이후의 긴급 기자회견, 그리고 법정공방에 이르기까지. 멤버들은 이 사건의 핵심 쟁점으로 ‘신뢰 관계 파탄’을 주장했다.
지난해 6월 3일 개정된 ‘대중문화예술인(가수·연기자) 표준전속계약서’ 개정안 제16조 제1항은 “‘기획업자’(기획사) 또는 ‘가수’ 중 일방이 이 계약에서 정한 내용을 위반하는 경우, 그 상대방은 유책 당사자 일방에 대하여 14일의 기간 동안 위반 사항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고, 그 기간 내에 위반 사항이 시정되지 아니하거나 혹은 시정될 수 없는 경우에는 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할 수 있으며,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위반 사항의 시정이 지체될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시정일로부터 14일의 범위에서 그 시정 기한을 연장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쟁의 양상은 기획사의 명백한 정산 불이행이나 부당 대우 같은 객관적 귀책사유가 아닌, ‘신뢰 훼손’이라는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사유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법원은 전통적으로 전속계약을 ‘고도의 신뢰 관계를 기초로 하는 계속적 계약’으로 보고, 신뢰가 깨지면 계약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해 왔다. 문제는 이 ‘신뢰 파탄’의 책임 소재가 모호할 때다. 아티스트 측이 일방적으로 신뢰 파탄을 주장하며 활동을 중단하거나 계약 해지를 통보할 경우, 기획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2025년 현재, 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가처분의 일상화”라고 꼬집는다. 소송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본안 소송 대신, 일단 가처분 신청을 통해 독자 활동의 길을 열어두는 전략이 하나의 ‘매뉴얼’처럼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표준계약서가 전제했던 ‘상호 성실 이행 의무’가 거대 팬덤과 여론을 등에 업은 아티스트의 영향력 앞에서 무력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표준전속계약서상의 모호한 조항들이 현장에서 ‘약자 보호’가 아닌 ‘계약 파기’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다. 특히 ‘신뢰 관계 파탄’이라는 문구에 대해 한국음악연대 윤동환 본부장은 “신뢰 파탄이라는 애매모호한 문구가 표준계약서에 들어간 것 자체가 혼란의 시작”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소 기획사의 경우 소속된 팀이 1~2개뿐인데, 멤버 한 명이 사소한 불만을 이유로 ‘신뢰 파탄’을 주장하며 법적 분쟁을 걸면 회사 업무 전체가 마비된다”며 “대외적 신뢰도 하락과 투자금 동결로 회사가 도산 위기에 처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기존의 관례를 깨고 뉴진스의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관련해 소속사 어도어의 손을 들어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업계는 이를 ‘비정상의 정상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매니지먼트연합 이남경 국장은 “그동안 법원은 기획사를 절대 갑, 연예인을 을로 보고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일단 계약 효력을 정지시켜 주는 경향이 강했다”며 “이 경우 연예인은 독자 활동으로 수익을 챙기지만 회사는 속수무책으로 손해만 입었다”고 꼬집었다. 이번 판결은 특별한 귀책사유(성폭력, 가혹행위 등)가 입증되지 않는 한, 분쟁 중에도 계약 관계는 유효하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아이돌노조 방민수 위원장은 “뉴진스와 같은 ‘슈퍼을’은 극소수일 뿐, 대다수 아이돌은 여전히 기획사보다 약자”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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