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KDI 등 전문가들 “재정개혁 더 미뤄선 안 돼”
조세지출 정비·의무지출 개혁·재정앵커 도입 제안
한국형 재정 스위치 만들 ‘골든타임’
대한민국이 국채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기위해서는 증세냐 감세냐를 따지기 전에 재정의 안정화를 뒷받침 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높다.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한국 재정은 이제 ‘위기 때 잠깐 넓혔다가 줄이는 그릇’이라기보다 ‘상시적으로 국채에 기대야 유지되는 구조’에 가까워졌다. 2026년 국가채무는 1415조원, 채무비율은 51.6%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국고채 발행은 연 200조원 안팎에서 상시화 되는 흐름이다. 고령화, 저성장, 복지수요 확대가 겹쳐 있는 지금, 재정의 방향을 바꾸려면 단순한 긴축이나 ‘더 써도 된다’는 낙관론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증세냐 감세냐’…이제 세입 시스템이 관건
지금까지 정치권은 ‘증세냐 감세냐’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논하려면 세율 인상 여부를 떠나 세입 시스템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연례협의 결과에서 한국 정부에 “연금 개편, 재정수입 확충, 지출 효율성 제고와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앵커 도입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여기서 말하는 ‘재정수입 확충’은 단기 증세만을 뜻하지 않는다. 각종 비과세·감면 등 조세지출을 정비해 과거 정책의 관성으로 유지되는 혜택을 줄이고, 세입 기반을 넓히라는 의미다.
GDP의 4% 안팎, 국세수입의 20%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조세지출을 보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성과가 입증되지 않은 항목부터 축소하는 것이 가장 정치적 저항이 적은 ‘사실상의 증세’가 될 수 있다.
IMF는 또 “저출생·고령화로 의무지출이 크게 늘어날 한국은 장기적인 재정개혁을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는 결국 세입 측에서도 중장기 로드맵 없이는 버티기 어렵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어느 세목을 언제,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지에 대해 10년, 20년 중장기 청사진을 공개하고 지금부터 사회적 논쟁을 시작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의무지출을 건드리지 않는 구조조정은 허상에 가깝다
매년 정부와 국회는. 역대급 지출 구조조정’을 내세운다. 실제로는 부처 이관이나 사업 이름 변경, 소규모 재량사업 감액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살림연구소는 2026년 예산안 심의 평가에서 “감액 9조원이라는 숫자 뒤에 행정적 이관 조정이 감액처럼 잡히는 착시가 상당했다”며 “실질적으로 감액한 금액은 4조원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같은 성격의 사업이 다른 이름으로 1조원 이상 증액된 사례도 있다”며 “실질적인 지출 축소라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도 덧붙였다.
IMF는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에서는 복지·연금 등 의무지출 개혁 없이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국민연금과 공적연금, 건강보험, 지방교부금과 같은 큰 덩어리는 정치적으로 민감하지만, 이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구조조정은 사실상 ‘장부 손질’에 그칠 뿐이라는 경고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최근 기고문에서 “관리재정수지가 이미 GDP의 4%를 웃도는 구조적 적자에 고착돼 있으며,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국채 발행이 상시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KDI는 또 “부채가 기술·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라면 미래의 사다리가 될 수 있지만, 정치적 필요의 산물로 쌓인다면 이자 부담이 오히려 기술개발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갉아먹는 구조가 된다”고 분석했다.
고령화, 저출산 등 복지 재원 마련은 매년 힘들어질 수 있다. 이때마다 국채발행이라는 땜질 처방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나라도 가까운 미래에 다른 선진국과 같은 나랏빚에 매몰 될 수 있다.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중기 재정앵커와 ‘위기·평시 스위치’ 도입 절실
IMF는 올해 연례협의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앵커 도입이 필요하다”며 “GDP 대비 부채 비율이나 재정적자 한도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에서 재정준칙 논의가 있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현 정부 들어서는 확장재정 기조 속에 사실상 준칙 도입이 포기됐다는 평가가 나온다는 점도 함께 지적됐다.
KDI 역시 “큰 폭의 재정 적자 흐름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확장 중심의 재정 운용에서 정상화 국면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들 전문기관들의 핵심은 명확하다. 위기 때는 확장재정이 불가피하지만, 평시에는 채무비율과 적자 규모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되돌리는 ‘스위치’를 법과 제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기 재정계획 안에 부채비율 상한이나 관리재정수지 목표를 명문화하고, 이를 벗어날 경우 정부가 의무적으로 보완계획을 내도록 하는 방식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재정준칙이 정치 상황에 따라 쉽게 완화·유예되는 ‘종이 호랑이’가 되지 않으려면, 준칙 변경 시 국회 특별절차나 국민 보고 의무 등 추가적인 견제장치도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재정의 방향은 정치가 결정한다. 예산정치의 현실은 여전히 ‘누가 더 많이 따오느냐’ 경쟁에 가깝다. 예산결산특위 심사는 10년째 비공개 소소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다. 여야 지도부 몇 사람이 밀실에서 예산안을 최종 조정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나라살림연구소는 “법정 시한 준수만 ‘정상화’로 포장하고 있지만, 예결위 심의 무력화와 밀실 협의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라고 꼬집었다.
국채공화국에서 벗어나려면, 누가 더 많이 풀어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세입·세출·제도를 함께 손보는 설계를 제안하느냐가 정치 경쟁의 기준이 돼야 한다.
IMF가 “고령화가 빠른 한국은 구조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단순히 숫자를 줄이라는 요구가 아니라 복지·연금·노동·세제 전반에 걸친 구조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미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