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템포에 담아낸 인간 관계의 복잡함
쇼츠, 릴스 등 짧은 길이의 영상물들만 소비되는 현재 가수가 곡 안에 담아낸 상징과 그들의 세계관, 서사를 곱씹어 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아티스트가 담아낸 '작은 영화'인 뮤직비디오를 충분히 음미해보려 합니다. 뮤직비디오 속 이야기의 연출, 상징과 메시지를 논하는 이 코너를 통해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재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페퍼톤스는 2010년 5월 17일 정규 3집 '사운즈 굿!'(Sounds Good!)의 수록곡 '핑퐁'(Ping-Pong)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전력을 다해 랠리에 몰입하는 자와 밥을 먹고 잠옷을 갈아입는 등 무료하게 대응하는 자(이장원)를 대조시키며 '나만 진심인 관계'가 주는 공허함을 극대화한다.
ⓒ페퍼톤스 '핑퐁' 뮤직비디오
줄거리
뮤직비디오는 탁구대 하나를 사이에 둔 신재평과 이장원의 기묘한 대결을 그린다. 시작은 평범한 스포츠물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태도에서 차이가 보인다. 신재평은 유니폼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스매싱을 날리며 경기에 집착한다. 반면 이장원은 이 치열한 경기장 안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시간을 보낸다. 상대가 사력을 다해 공을 넘기는 동안 그는 밥을 먹고, 유유자적 책을 읽으며 심지어 잠옷으로 갈아입고 하품을 한다. 결국 이 시합은 이장원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며 허무하게 끝이 난다.
해석
인간관계, 특히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탁구라는 비유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한쪽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공(감정)을 넘길 때 다른 한쪽은 그 노력을 일상의 지루함 정도로 치부한다. 신재평의 땀방울이 이장원의 잠옷과 대비될 때, 시청자는 관계의 비극을 목격한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고, 끝났어도 해소되지 않는 찝찝한 슬픔이 탁구공 소리에 실려 증폭된다. 신재평은 마지막에 승리를 거머쥐고 환호하지만 그 환희는 이내 기묘한 허탈감으로 변한다. 상대는 이미 이 경기에 마음이 없었다는 사실을, 오직 나만이 이 좁은 탁구대 위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페퍼톤스 '핑퐁' 뮤직비디오
총평
'족구왕'을 연출한 우문기 감독이 대학 시절 페퍼톤스의 열혈 팬으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연출을 맡으며 시작됐다. 당시 페퍼톤스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 감독을 찾기 위해 대학가에 공고를 냈고, 우문기 감독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그 기회를 잡았다. 거창한 자본이나 화려한 특수효과 대신, '탁구'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비틀어낸 우 감독의 재기발랄함은 예산의 한계를 넘어선 독창적인 미장센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간결한 구성은 오히려 곡이 가진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전달하는 힘이 됐다.
페퍼톤스를 흔히 우울함을 치료하는 '뉴 테라피' 밴드라 부르지만 이들은 사실 가장 밝은 조명 아래서 인간의 다양한 내면을 보여줄 줄 아는 영리한 창작자들이다. 우문기 감독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이 주제를 미니멀한 비주얼과 키치한 유머로 포장해 냈다. 게스트 보컬 뎁(deb)의 무심한 듯 청량한 목소리는 이장원의 무료함과 닮아 있고, 고조되는 곡의 모듈레이션은 신재평의 절박함과 맞닿아 있다. '핑퐁'은 페퍼톤스가 단순한 멜로디 메이커를 넘어, 인간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곡이다.
한줄평
랠리도 진심도 혼자면 헛스윙, 있을 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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