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에서 ‘넘버원’까지…최우식 청춘의 성장기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2.16 11:26  수정 2026.02.16 19:54

김태용 감독과 12년 만에 재회

하민이 디테일 기준은 '너무 쉽게 보이지 말자'

어느 날부터 엄마 밥그릇 위에 숫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한 숟가락을 뜰 때마다 줄어드는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사라진다. 영화 '넘버원'은 기이한 설정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가장 현실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가.


최우식은 그 질문을 마주한 인물 하민을 연기했다. 숫자를 본다는 판타지적 장치를 걷어내면, 하민은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서툴게 버티는 평범한 아들이다. 최우식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과장하기보다, 끝까지 현실로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인물을 쌓아 올렸다.


ⓒ㈜바이포엠 스튜디오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배우 최우식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김태용 감독과의 깊은 신뢰 덕분이다. 데뷔작 '거인'(2014) 이후 12년 만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서 쌓아온 경험치를 '넘버원'이라는 결실로 맺어냈다. 배우에게는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연출자와 재회해, 그간의 성숙함을 증명해 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김태용 감독님과 저는 영화 '거인' 이후 많이 성장했어요. 서로 경험치가 쌓인 덕분이죠. 신기한 건, 제가 평소 다른 배우들도 다 하는 기본적인 준비만 했을 뿐인데 감독님이 제 성장을 엄청 크게 느끼셨다는 거예요. 저 보시면서 '너 이제 다 컸구나, 진짜 배우구나' 이러시더라고요. '거인' 때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만났거든요. 세상에 찌들지도 않은, 마치 날개 같은 두 사람이 만나서 진정성 있게 부딪쳤어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면서 서로를 더 진심으로 알게 됐죠. 그래서 가끔 지금 사회에 찌든 모습들 보면 그때가 생각나서 씁쓸하기도 하더라고요."


'넘버원' 하민은 엄마가 먹는 음식마다 숫자가 보이고,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판타지적 설정이지만, 최우식은 이 기이한 상황을 철저히 현실로 받아들이는 인물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하민이의 디테일을 감독님과 처음부터 잡을 때 세운 기준은 '너무 쉽게 보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색한 상황을 말로 풀어내려 하고, 문제를 직관하기보다 능글맞게 피해 가는 말투를 쓰는 게 하민이만의 대처법 이거든요. 감독님이 옆에서 계속 그 중심을 잡아주셔서 현장에서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이게 판타지 같은 일이지만 이 친구는 진심으로 믿고 엄마를 지키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노력했습니다. 하민에게 숫자는 거대한 트라우마잖아요. 카운트다운을 보고, 신호등 숫자가 내려가는 것을 보며 겪어온 것들이 많죠. 판타지적인 설정이 많더라도, 영화 속 인물들은 그것을 현실로 느끼고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제 가장 큰 목표였어요."


최우식과 장혜진, 두 배우가 '기생충' 이후 7년 만에 재회하며 빚어내는 시너지는 이번 작품의 가장 강력한 관전 포인트다. 이미 검증된 두 사람의 호흡에 공승연이라는 새로운 결이 더해지며 ‘넘버원만의 독특한 공기가 완성됐다.


"장혜진 선배님과는 '기생충' 이후 다시 모자로 만나게 됐어요. '기생충' 때는 1대 1 호흡보다는 전체적인 앙상블이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단 둘이서 감정을 오가고 대사를 주고받으며 더 깊이 교감했어요. 워낙 편안한 사이라 이전에는 못 봤던 모습들도 많이 보게 됐고요. 정말 인복이 좋았던 것 같아요. 감독님과는 '거인' 때부터, 선배님과는 '기생충'으로 인연이 있었잖아요. 여기에 새로 합류한 공승연 배우까지 성격이 잘 맞아 현장에 금방 녹아들었거든요. 다루는 소재는 무거울 수 있어도, 현장에서는 매일 깔깔 대며 즐겁게 촬영했어요. 선배님 생일 때 제가 고기 수육을 사서 생일상을 차려드린 적이 있는데, 선배님이 너무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인간관계에 서툰 편이에요. 누군가에게 베풀거나 잘해주는 일이 많지 않은데, 가끔 한 번 하면 그게 크게 보이나 봐요.(웃음) 사실 제가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았어요."


'넘버원'에서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엄마 은실과 아들 하민을 잇는 가장 따뜻하고도 가슴 아픈 매개체다. 최우식은 극 중 수없이 반복되는 먹는 장면들에 기교를 더하는 대신, 그 순간에 담긴 온기를 온전히 느끼는 쪽을 택했다.


"먹는 장면이 많은 영화지만, 딱히 더 맛있게 먹어야겠다는 의식은 안 했습니다. 푸드팀이 실제로 정말 맛있는 음식을 항상 준비해 주셨거든요. 촬영 의자 바로 옆에서 소고기국을 끓이시고, 밑반찬부터 밥까지 매번 새 걸로 준비해 주셔서 촬영 내내 행복하게 먹었습니다. '가장 생각나는 집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그냥 어머니가 해주신 스팸, 계란후라이, 김치찌개가 제일 좋아요. 어머니가 해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소중한 거죠. 그래서 맛있게 먹는 모습보다, 그 행복한 순간이 행복하게 보이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부산이 배경인 만큼 사투리는 '넘버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배우에게 사투리를 완벽하게 체화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숙제 중 하나다. 최우식 역시 부산 사투리라는 장벽 앞에 섰지만, 그는 형식적인 완결성에 매몰되는 대신 배우로서의 본질인 감정을 붙들기로 했다. 기술적인 어색함을 감수하더라도 인물의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그의 정공법은 오히려 연기에 단단한 확신을 실어주었다.


"장혜진 선배님과 김태용 감독님이 같은 동네 출신이셔서 두 분만의 사투리 디테일이 있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투리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들어갔어요. 사투리는 너무나 큰 영역이라 아무리 완벽하게 해도 네이티브가 아니라는 걸 관객들은 아실 테니까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감정이었어요. 사투리에 너무 집중하다가 감정을 놓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잃는 상황이 걱정됐거든요. 정말 중요한 감정 신에서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사투리가 어색하다는 평은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어요. 다만 10대와 30대 하민의 말투에는 차이를 뒀습니다. 30대의 하민은 서울 생활을 오래 해서 좀 더 서울말에 가깝게 표현했어요."


감정의 밑바닥까지 훑어야 하는 연기는 때로 배우의 일상을 잠식하기도 한다. 최우식은 스스로를 '감정 연기를 겁내는 배우'라 칭하며, 인물의 슬픔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하중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에게는 감정 연기에 대한 일종의 징크스가 있어요. 사실 전 감정을 쓰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겁도 많이 내는 편이에요. 슬픈 연기를 찍다가 그 늪에 빠져서 일상까지 불행하고 우울해질까 봐 피하기도 했고요. 감정 소모가 큰 이번 영화에서는 상대 배우들에게 정말 받기만 했습니다. 승연이와 국밥을 먹으며 얘기할 때도, 엄마와 대화할 때도 계속 감정을 받기만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본마음을 꺼내는 정도였어요. 두 분이 워낙 잘 끌고 가주셔서 감정을 받다 보니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하민은 중후반부터 암 환자가 된다. 최우식은 하민의 병든 몸을 어떻게 표현할 지도 중요한 선택지였다.


중후반부 암 환자의 모습을 너무 리얼하게 표현했다면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가 깨졌을 것 같습니다. 탈모나 얼굴 변화 같은 외적인 면을 현실적으로 파고들기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집중했습니다. 언론 시사회 때 뒷자리에서 제 모습을 보니 '아픈 비둘기' 같더라고요. 다행히 슬픈 장면 이후에 그런 얼굴들이 나와서 극이 너무 슬프기만 하지 않게 조절이 된 것 같습니다.


'넘버원'이 판타지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음에도 결국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건, 누구나 마주하게 될 부모와의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저는 항상 이런 걱정을 달고 살았어요. 또래 친구들보다 저희 부모님 연세가 훨씬 많으셔서, 초등학생 때부터 '내가 서른 살이 되면 부모님은 일흔, 여든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딱 그때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을 찍으면서 보니, 저 역시 일에 치이고 다른 것들에 집중하느라 그 질문들을 잊고 살았더라고요. 함께할 수 있는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 사진 말고 동영상으로 더 많이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에 찌들거나 연애 혹은 일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부모님의 소중함을 잊곤 하잖아요. 관객들도 영화 속 하민과 함께 성장하며 스스로 질문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밥을 못 드시는 분들께는 이 영화가 위로가 됐으면 해요."


국내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성장했지만, 부모님에게 최우식은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마음 쓰이는 늦둥이 아들인 모양이다. 그는 스크린 밖에서 자신이 어떤 아들인지를 묻는 질문에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본인의 실제 모습을 공개했다.


"저는 아들보다는 딸 같은 아들인 것 같아요. 하민이 엄마에게 말장난을 치는 것처럼 저도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며 살갑게 지냅니다. 늘 잘해드리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아들이에요. 늦둥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더 베풀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죠. 부모님은 제가 고생하는 모습을 별로 안 좋아하세요. 제가 울거나 도망다니고 찔리는 연기보다는 예능이나 밝은 멜로를 더 좋아하시거든요. 특히 예능은 재방송을 많이 해주니까 TV에서 저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아하셨어요. '우주메리미'를 정말 좋아하셨던 반면, '기생충'이나 '이호남감', '거인' 같은 작품들은 보면서 많이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바이포엠 스튜디오

배우 최우식의 가장 큰 무기는 평범함 속에 감춰진 비범함, 그리고 관객의 경계심을 허무는 친근함이다. 그는 자신을 향한 업계의 러브콜이 화려한 기교가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통의 얼굴'에서 기인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제가 확실히 '불편하지 않은 얼굴'을 가진 것 같아요.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의 얼굴을 많이 담고 있달까요.(웃음) 성장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제 나이대와 잘 맞아서 제 경험을 많이 녹여낼 수 있었어요. '거인'의 영재가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고 봉준호 감독님이 저를 선택해 주셨던 것처럼, 다행히 그런 모습들을 좋게 봐주시는 덕분에 캐릭터와 함께 저도 성장할 수 있었어요."


결국 영화 '넘버원'이 하민의 입을 빌려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우리 곁의 소중한 존재와 함께할 시간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진실이다. 최우식은 극 중 하민이 사투를 벌이며 지켜낸 그 숫자의 가치를 자신의 일상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최우식은 차기작을 향한 배우로서의 갈증만큼이나, 스크린 밖의 평범한 행복을 촘촘히 채워 나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번에 '넘버원'을 찍으면서 정말 느낀 게 많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족들한테 좀 더 신경 쓰면서 행복하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부모님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입니다. 그게 결국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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