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선 생기자 가격도 줄세우기
경쟁 대신 눈치보기 횡행
산업부 장관, 청주 알뜰주유소 점검
정부가 설정한 1800원 상한선 아래로 주유소 가격이 1797~1799원대에 집중되는 흐름을 개념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특히 1799원에 가격이 몰리는 모습을 통해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나타난 ‘상한선 직전 가격 쏠림’ 현상을 시각화했다. ⓒ챗지피티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꺼내 든 지 나흘 만에 현장에서는 벌써부터 상한제의 그늘이 드러나고 있다. 가격 인하라는 정책 목표와 달리 일부 주유소에서는 휘발유 값을 상한선 바로 아래인 1799원 수준으로 맞추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가격을 더 낮출 여지가 있어도 상한선 근처에서 판매가가 서로 비슷하게 굳어지는 현상이다. 가격 통제가 시장 전반의 인하 경쟁을 유도하기보다 오히려 ‘여기까지는 받아도 된다’는 신호로 작동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지난 13일부터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했다. 정유사 공급가격 최고액은 보통휘발유 ℓ당 1724원, 자동차용 경유 1713원으로 정했다.
1800원 벽 아래…1799원의 심리전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전국 평균 가격은 분명 하락했다. 시행 첫날 전국 주유소의 43.5%가 휘발유 가격을, 43.8%가 경유 가격을 내렸다. 전국 평균 휘발유 값은 13일 1893.3원에서 14일 1847.73원, 16일 오전 1836.54원으로 내려왔다. 경유도 같은 흐름을 보이며 1800원 중반대로 떨어졌다.
문제는 체감이다. 서울 만남의광장 주유소는 휘발유 1799원, 경유 1798원의 가격표가 등장했다. 이는 최고가격제가 실제 소비자 가격을 끌어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상한선 근처 가격으로 판매가 수렴하는 신호도 함께 드러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한국석유공사가 운영 중인 오피넷에 따르면 16일 낮 12시 기준 대전광역시 유성구 주유소의 경우 전체 55개 주유소 중 휘발유 가격을 1797~1799원으로 책정한 곳은 모두 19곳으로 확인됐다. 이는 유성구 전체 주유소의 34.5%에 달하는 비중이다.
대전 유성구 주유소 휘발유 가격 최다 분포 구간 인포그래픽. 황금색으로 입체적으로 튀어나온'1797~1799원'구간이 전체 조사 주유소의 약 34.5%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보여주고 있다. ⓒ제미나이
특히 최고가인 1800원에서 단 1원 뺀 1799원에 판매 중인 주유소만 14곳에 달했다. 제도 시행 이후 가격 상향 평준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초 최고가격제는 국제 유가 급등기에 국민 부담을 덜기 위한 방어선으로 설계됐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 상한선이 오히려 '가격 지지선' 역할을 하고 있다. 주유소들이 가격을 더 낮추기보다 규제 범위 내에서 최대 이익을 얻기 위해 1799원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경쟁이라면 입지와 재고, 판매 전략에 따라 가격 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가격 통제 국면에서는 오히려 상한선 직하단이 사실상 기준점처럼 작동할 수 있다. ‘1800원은 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추가 인하 압력은 약해지는 구조다.
이런 흐름은 최고가격제의 구조적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 이번 제도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격 상단을 묶는 방식이다. 곧바로 소비자 판매가격을 일괄 규제하는 장치는 아니다.
결국 주유소 단계에서는 재고 상황과 마진 판단에 따라 가격 반영 속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실제 정부도 시행 초기 가격 하락 주유소가 40%를 넘겼다고 평가하면서도, 상당수 주유소는 기존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내렸지만 덜 내린다, 재고 핑계와 체감의 간극
현장에서는 ‘분명 떨어지긴 했지만 기대만큼은 아니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주유소들은 대체로 기존 고가 재고를 먼저 소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정부도 재고 소진과 판매가 반영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고 설명해 왔다. 다만 이런 설명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별개 문제다.
공급가격이 낮아졌는데도 판매가격이 상한선 바로 아래에서 획일적으로 형성된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책 효과보다 ‘1원 꼼수’가 먼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최고가격제는 주유소 간 자율 경쟁을 촉진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단을 규정하는 제도다. 이 경우 경쟁력 있는 사업자가 가격을 선도적으로 내리는 대신, 다수 사업자가 심리적 기준선에 기대 비슷한 가격표를 유지하려는 유인이 생길 수 있다.
시행 첫날 전국 최저가 주유소는 휘발유 1715원, 경유 1655원까지 내려갔고 일부 주유소는 하루 사이 200~300원대 인하도 단행했다. 가격을 충분히 낮출 수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격차가 크다는 의미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6일 청주시 소재 자영 알뜰주유소인 창현주유소를 방문해 탱크로리 입하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정부도 이런 기류를 의식하는 모습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주 서울 소재 정유사 직영 주유소를 찾은 데 이어, 16일 오전 충북 청주시 자영 알뜰주유소인 창현주유소를 방문해 가격 반영 동향을 직접 점검했다.
김 장관은 현장에서 “오늘로 최고가격제 시행 4일째인데 정유사 공급가격 인하가 주유소 소비자 가격에 반영되는 속도가 느린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앞으로도 석유 가격 모니터링과 현장 단속, 오일신고센터 운영을 통해 최고가격제가 소비자 가격에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여기에 가격 인하에 적극적인 ‘착한 주유소’를 발굴해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김 장관은 “주유소 재고가 소진되면 이전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주유소 탱크를 채우는 만큼 소비자 가격이 낮아지는 건 당연하다”며 “소비자들이 주유소에서 최고가격제 시행 효과를 체감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총동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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