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안을 지나치게 심각하고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빅토르 안에게나 그와 경쟁을 펼쳐야 하는 후배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에게나 불필요한 부담을 안길 수도 있다. ⓒ 연합뉴스
[데일리안 스포츠]러시아 쇼트트랙 스케이팅 국가대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 러시아 귀화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시리즈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빅토르 안은 5일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서 열린 ‘2013-24 삼성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2차대회 500m 결승에서 40초764 기록으로 2위 위다징(중국·40초938), 3위 박세영(한국·42초301)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빅토르 안은 같은 날 남자 1500m 결승에서도 2분16초922의 기록으로 1위 샤를 아믈랭(캐나다·2분16초604), 2위 이한빈(한국·2분16초760)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빅토르 안은 스스로 전성기의 몸 상태와 기량을 회복했음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한 단계 발전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폭발적인 순간 스피드와 원심력을 무시하는 듯한 코너링과 추월기술 등 천부적인 재능과 충실한 훈련이 바탕이 된 기량,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의 노련함이 어우러지면서 결점을 찾기 힘든 선수로 진화했다.
이런 추세라면, 빅토르안은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에 여러 개의 메달을 안겨주면서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이후 8년 만에 다시 한 번 ‘쇼트트랙 황제’의 칭호를 얻을 수도 있다. 빅토르 안이 소치동계올림픽에서 ‘황제 귀환’을 선언한다면,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에 소치 동계올림픽은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동계올림픽 경험이 없는 현 대표팀 주축 선수들의 면면 때문에 그동안 노진규, 신다운 등 신예들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음에도 일각에서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이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왔던 게 사실이다.
여기에 ‘홈팀’ 러시아 대표팀에서 전성기 기량과 다를 바 없는 기량을 회복한 상태로 버티고 있는 빅토르 안의 존재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게 ‘잔인한 소치 동계올림픽’을 예감케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개막 전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한국 대표팀의 한 코치는 빅토르안에 대해 “그저 외국 대표팀의 한 선수에 불과하다”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오히려 그처럼 무관심한 대답이 오히려 빅토르안이 한국 대표팀에게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으로 비쳐졌다.
이번 대회가 열린 목동아이스링크 안팎에서는 현 러시아 대표선수 빅토르안과 과거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을 차지했던 전 대한민국 대표선수 안현수를 바라보는 복잡한 시선들과 그에 따른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목동아이스링크 관중석에는 그를 응원하는 적지 않은 수의 팬들이 보였고, 링크에는 ‘러시아 에이스’가 되어 돌아온 빅토르안을 상대해야 하는 한국 대표팀이 있었다. 팬들은 한국 대표선수들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빅토르안이 한국 대표선수들을 포함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좋은 성적을 거두길 응원했다.
빅토르 안을 향한 팬들의 이 같은 열렬한 응원 속에는 그가 다시 올림픽 영웅으로 부활하라는 격려의 의미도 담겨있지만 그가 조국에서 다시 올림픽의 꿈을 꾸지 못하고 러시아로 귀화, 빅토르안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올림픽을 꿈꿔야 하는 현실을 만든 국내 빙상계의 부끄러운 자화상에 대한 야유가 섞어 있다.
볼썽사나운 파벌 다툼, 그에 따른 승부 담합과 선수에게 가해지는 따돌림 등 각종 부조리로 빅토르 안이 한국을 떠나 러시아 귀화를 결심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한국 빙상계가 부메랑을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빅토르 안에 대한 응원 속에 녹아 있다는 말이다. 결국, 빅토르안은 이번 대회를 통해 내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 대표팀은 물론 세계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에 ‘미지의 변수’가 아닌 ‘실제적 위협’이 된 양상이다.
앞으로 빅토르 안이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거둘수록 기본적으로 한국 쇼트트랙계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고, 이런 반응에 일부 팬들은 통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지는 않지만 첨예한 대결구도는 선수들 개개인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
빅토르안에 대한 보도들을 살펴보던 중 필자는 흥미로운 몇 컷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경기 직후 환한 미소와 함께 ‘선배’ 빅토르 안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네는 한국 대표선수의 모습과 이들 두 선수가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들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선배이자 경쟁자인 빅토르 안에게 선뜻 악수를 청하는 후배 한국 선수들과 이를 따뜻하게 맞는 선배 빅토르안의 모습에서 스포츠맨십을 운운하기 전에 같은 조국의 선후배 쇼트트랙 선수 사이의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2011년 4월 빅토르안이 러시아 귀화에 대한 결심을 밝히는 한 인터뷰에서 “올림픽의 꿈을 이루는 데 가슴에 어느 나라 국기가 붙어 있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이유 가운데 대한빙상경기연맹을 포함한 한국 빙상계와의 불화가 주된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보면 러시아 대표선수기 된 것은 빅토르안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개인적으로 좀 더 좋은 조건과 상황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소치동계올림픽을 통해 고대하던 올림픽의 꿈을 다시 실현하려 하는 빅토르 안을 지나치게 심각하고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빅토르 안에게나 그와 경쟁을 펼쳐야 하는 후배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에게나 불필요한 부담을 안길 수도 있다. 이젠 빅토르 안이 된 안현수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게가 좀 더 가벼워 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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