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최초 입단’ 오승환 아닌 박현명, 그는 누구인가
한신 첫 한국인 선수는 오승환 아닌 박현명
평양고보 출신 우완투수로 1938년 입단
'특급 수호신' 오승환이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선수 해외 진출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선수는 많았다. 현재 KIA를 이끌고 있는 선동열 감독은 현역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로 건너가 '무등산 폭격기'에서 '나고야의 수호신'으로 활약했다.
또 고(故) 조성민을 비롯해 정민태, 정민철 등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고 임창용과 이혜천 등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건너가기도 했다. 이승엽도 지바 롯데 마린스, 요미우리를 거쳐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고 박찬호 역시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친 뒤 1년 동안 오릭스에서 뛰기도 했다. 이대호 역시 오릭스에서 2년동안 성공적인 생활을 보내고 이적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한 선수를 보면 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곤 한다. 선동열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최초의 선수로 기록됐고 이종범 현 한화 코치 역시 최초의 타자가 됐다.
오승환 역시 언론에 의해 '한신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로 포장됐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한신에 입단했던 한국인 선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인공은 바로 박현명으로 지난 1938년 한신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다. 일반 팬들에게 박현명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하지만 야구 관계자라면 그리 낯설지가 않다.
박현명을 비롯해 삼형제가 바로 한국 야구의 뿌리를 내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평양고보 출신의 우완투수 박현명은 평양을 대표하는 야구 선수였다. 둘째 동생 박현덕은 인천 동산고 야구부를 창설했고 막내 박현식은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우승의 주역으로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을 지냈다.
박현식 감독은 3승 10패라는 초라한 성적만 남긴 채 후임 김진영 감독에게 바통을 넘기며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단명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겼지만 1984년부터 1989년까지 KBO 심판 위원장을 역임했고 1991년에는 LG 2군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05년 7월에 벌어졌던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시구를 하기도 했던 박현식 감독은 한 달 뒤 위암으로 타계했다.
옛 신문을 찾아보면 박현명은 여러 선수 가운데 단순한 한 명이 아니다. 이영민과 쌍벽을 이룬 선수였다. 이영민은 바로 그의 공로를 높이 기리기 위해 제정한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영민은 아직까지도 야구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 박현명은 그가 한신에 입단한 것 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묻혀있다.
일본 프로야구 입단 전의 그의 전적은 화려하다. 이영민과 쌍벽을 이뤘다는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1934년 9월 5일 동아일보에는 야구쟁패전에서 박현명이 선발로 나선 평양팀이 고려팀을 16-6으로 꺾은 기사가 나온다.
또 박현명은 이영민과 선발 맞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1936년 7월 일자 동아일보에는 전경성(全京城)팀과 경기에서 이영민과 박현명이 선발 맞대결을 펼친 기록이 나온다. 당시 경기에서 이영민이 이끈 전경성팀이 8-0으로 대승했지만 7회까지 0의 행진이 계속 이어졌던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박현명이 마운드를 내려간 뒤 전경성팀이 대거 8득점하면서 이긴 경기였다.
1937년 기사에서는 이영민과 박현명이 같은 팀에서 뛴 것도 발견할 수 있다. 운동기자구락부 주최 애국기헌납조성 야구대회에서 이영민이 감독으로 있던 고려구락부에 박현명이 소속됐던 것.
이후 박현명은 전국도시대항야구에서 체신 소속으로 활약하다가 1938년 오사카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오사카 타이거즈가 바로 한신의 전신이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179cm에 71kg의 당당한 체격이다. 지금 선수와 비교하면 다소 왜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1911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탄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메이지대가 서울에서 원정 경기를 펼쳤을 당시 7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던 그는 1938년 도시 대항 대표 선수로 일본에 건너가 빠른 공과 낙차 크면서도 제구가 좋은 커브를 선보이며 오사카 타이거즈의 마음을 잡았다.
등번호 20번으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성공 시대가 열리는 듯 보였지만 그의 일본 프로야구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오사카 타이거즈에는 니시무라 유키오라는 에이스가 있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오사카에서 뛰었던 니시무라는 3년 동안 112경기 출전, 86경기 선발로 나서 완투 51회, 완봉 9회 등으로 55승 21패의 기록을 남긴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지만 1977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던 선수다.
니시무라 등에 밀리며 제대로 기회를 잡지 못한 박현명은 1939년 8월 12일 비로소 첫 선발 출전하며 4.2이닝 피안타 5개로 1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했지만 패전투수가 됐다. 나흘 뒤인 8월 16일 난카이와 경기에 선발로 나서 3.2이닝 피안타 7개 무실점으로 호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기록은 단 2경기 뿐이다. 그가 오사카 타이거즈에서 남긴 기록은 2경기 선발 출전에 8.1이닝 피안타 12개, 1실점에 1패다.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에, 그것도 일본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보쿠 겐메이라는 박현명의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썼을 정도로 '조선인'의 긍지를 갖고 있는 선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일본 프로야구를 떠난 뒤 기록은 거의 없다. 1940년 귀국한 박현명은 한국 전쟁이 끝난 뒤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0년대 박현명이 중심이 돼 북한에서 야구 경기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꽃을 피우지 못했고 박현명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박현명 말고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 출신 선수는 더 있다. 부산 출신의 이팔룡은 일본에 건너가 후지모토 히데오라는 이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 200승 87패에 1.90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다. 특히 이팔룡은 1950년 6월 28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선수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한국 출신 선수로도 기록됐다.
또 유완식은 1939년부터 1944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한 선수로 이후 전인천군야구팀을 결성해 1947년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 우승을 이끌고 1954년에는 아시아선수권에서 국가대표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유완식을 기리기 위해 SK는 지난 2007년부터 인천 연고지역 우수 아마 야구선수들에게 '유완식 투수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비록 2경기 출전 기록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박현명은 이영민과 함께 '조선 야구'를 대표하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그리고 당당히 일본 땅에서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다. 오승환은 한국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간 최초의 한신 투수인 것은 맞지만 첫 한국 출신 한신 선수는 아니다.
대한야구협회는 지난 17일 한국 야구 역사의 시작을 1905년이 아닌 1904년으로 잡고 내년을 '한국 야구 탄생 110년의 해'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야구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려 한다면 박현명 같은 선수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오승환 이전에 한신 타이거즈에는 박현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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