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KBO리그 역대급 트레이드 TOP 5

데일리안 스포츠 = 김윤일 기자

입력 2016.02.27 07:36  수정 2016.02.28 09:53

가장 충격적인 트레이드는 최동원, 장효조, 김시진

쌍방울과 히어로즈의 현금 트레이드도 꾸준히 회자

트레이드란 물건과 물건, 또는 물건과 돈을 사고파는 행위를 말한다. 스포츠에서의 트레이드는 프로 구단 간 전력 향상 또는 이외의 목적으로 소속 선수를 이적시키거나 교환하는 일을 지칭한다.

트레이드가 활발한 미국 메이저리그와 달리 KBO리그에서는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특히 지역색이 강하고, 소속감이 강한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거 트레이드가 된 당사자들은 허탈감을 넘어 배신감이 든 경우도 상당했다고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넥센 히어로즈가 주도한 트레이드로 인해 KBO리그에서의 이적도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모든 구단들이 트레이드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로 임하고 있으며,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긍정적 제도라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KBO리그에서의 첫 번째 트레이드는 원년 시즌이 끝나고 난 뒤인 1982년 11월 22일에 이뤄졌다. 삼성에서 입지가 좁아진 서정환은 트레이드를 자청했고, 구단 측은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해태로 이적 시켰다. 이듬해 6월에는 MBC 정영기와 롯데 차동열이 유니폼을 바꿔입었다. 이는 최초의 선수 대 선수 트레이드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야구팬들을 충격으로 몰어넣었던 ‘역대급’ 트레이드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최동원-김시진의 트레이드가 이뤄진 한 달 후 장효조마저 롯데로 건너갔다. ⓒ 연합뉴스

1988년 삼성-롯데 대형 트레이드

1988시즌이 끝나고 그해 11월 22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뉴스가 터졌다. 바로 삼성과 롯데의 선수 7명이 포함된 초대형 트레이드였다. 먼저 삼성은 김시진, 허규옥, 전용권, 오대석을 보냈고, 롯데는 최동원과 오명록, 김성현을 내줬다.

최동원은 말이 필요 없는 한국시리즈 4승 투수였고, 김시진 역시 KBO리그 사상 최초로 100승을 올린 대투수였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이적이 발생했던 원인은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던 최동원에 대한 보복성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의 중심이 되었던 최동원과 김시진은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부진에 빠졌다.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삼성과 롯데는 다시 한 번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킨다. 이번에는 삼성 장효조와 장태수가 김용철, 이문한과 바뀌었다. 특히 장효조는 이전 시즌 MVP였지만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됐고, 김용철은 최동원과 함께 선수협 창단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쌍방울 안방마님 박경완은 현금 9억 원에 현대로 이적했다. ⓒ 연합뉴스

쌍방울 레이더스 현금 트레이드

제8구단이었던 쌍방울은 IMF 사태로 인해 모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자 고충이 고스란히 야구팀에 전달됐다. 당시 쌍방울이 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현금 트레이드였다.

첫 번째 팔린 선수는 안방마님 박경완이었다. 당시 최고의 포수였던 LG 김동수과 많은 비교가 될 정도로 주목받는 포수였던 박경완은 1997시즌이 끝난 뒤 현금 9억 원+김형남, 이근엽과 맞바꾸어 현대로 이적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98시즌 도중에는 에이스였던 조규제가 현금 10억 원+가내영, 박정현과의 트레이드에 포함됐다. 상대는 이번에도 공격적인 전력보강을 이루던 현대 유니콘스였다.

정점은 그해 시즌이 끝난 뒤 돌격대 유니폼을 벗은 김기태와 김현욱이었다. 당시 쌍방울이 삼성으로부터 받았던 조건은 현금 20억 원과 이계성, 양용모였다. 이 트레이드로 쌍방울은 사실상 리그에서의 경쟁력이 사라졌고,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김성근 감독마저 크게 허탈해했다는 후문이다.

쌍방울의 현금 트레이드는 급기야 신인 지명권에서도 나타났다. 1999년 신인 선수들에 대한 2차 지명이 실시된 11월 2일, 쌍방울은 현대에 2차 1라운드 지명권을 현금 5억 원에 팔았다. 이를 보다 못한 KBO는 이후 신인 지명권 양도를 금지시켰다.

삼성은 양준혁을 내주고 데려온 임창용을 품고 한국시리즈 우승 숙원을 푼다. ⓒ 연합뉴스

1998년 양준혁-임창용 트레이드

90년대말 IMF 여파는 쌍방울뿐만 아니라 해태에도 닥쳤다. 해태 구단은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당시 팀 내 최고의 선수였던 임창용을 트레이드 매물로 내놓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해보지 못한 삼성이 임창용 영입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임창용이 삼성 유니폼을 입는 대신 해태로 건너간 선수는 놀랍게도 양준혁이었다. 삼성은 양준혁 외에 곽채진, 황두성까지 보냈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현금 20억 원이 더 얹어졌다.

하지만 양준혁은 이 트레이드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적 거부에 이어 해외 진출을 선언하는 등 완강하게 버텼지만 결국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김 감독이 내건 조건은 1년 뒤 타 팀 트레이드였다. 이를 통해 선수 권익에 관심을 갖게 된 양준혁은 1년 뒤 선수협 창립을 주도하게 된다.

장원삼의 현금트레이드는 1년 뒤 승인을 받았다. ⓒ 연합뉴스

히어로즈 현금 트레이드

아직까지도 모기업이 없는 유일한 구단인 히어로즈는 창단 초기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주축 선수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먼저 2008년, 히어로즈는 에이스 장원삼을 현금 30억 원+박성훈을 받는 조건으로 삼성과 합의했다. 하지만 KBO로부터 트레이드 불가 통보를 받았고, 본격적인 트레이드는 1년 뒤 시작됐다.

2009시즌이 끝난 뒤 KBO 가입금을 완납한 히어로즈는 동시에 3명의 선수를 현금으로 내다팔았다. 장원삼은 20억 원+박성훈, 김상수와의 트레이드로 삼성행이 결정됐고, 이택근은 25억 원+박영복, 강병우라는 조건으로 LG로 옮겼다. 또한 이현승은 10억 원+금민철로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10시즌 개막 직전에는 마일영이 3억 원+마정길의 조건으로 한화로 갔고, 2010시즌 중에는 황재균, 그리고 시즌 후에는 고원준이 나란히 롯데로 이적했다. 롯데와의 트레이드에서는 현금 거래가 없었다고 발표됐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박병호는 '탈LG 효과'의 정점이다. ⓒ 연합뉴스

2000년대 후반 ‘탈LG 효과’ 트레이드

트레이드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성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장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바로 LG를 떠난 선수들이다.

LG서 ‘2군 본즈’로 불렸으나 유독 1군서 성적을 내지 못한 김상현은 2009시즌 초 KIA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미친 듯한 맹활약이 시작됐다. 그해 김상현은 타율 0.315 36홈런 127타점을 기록하며 KIA 우승에 일조했다. 트레이드된 선수가 그해 MVP가 된 사례는 김상현이 유일하다.

김상현보다 더한 충격은 박병호다. 2005년 LG 1차 지명자였던 박병호는 잠재력이 터지지 않자 결국 넥센행이 결정됐고, 이듬해 잠실이 아닌 목동서 폭발했다. 2년 연속 MVP를 수상했고 4년 연속 홈런왕, 그리고 현재는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했다.

김상현, 박병호 외에도 LG서 트레이드된 뒤 타 팀에서 MVP까지 오른 선수는 김상호와 서건창까지 무려 4명에 이른다. 여기에 국가대표 테이블세터인 이용규도 ‘탈LG 효과’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 중 하나다. 그리고 올 시즌은 지난해 SK로 건너온 정의윤과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이적한 이진영이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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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일 기자 (eunic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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