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왜 그를 기용했을까?
“이혼할 사람 많을 거라고 전하라”
“윤석열 대통령 존안자료도 있다”
21대 총선 개표가 진행 중이던 2020년 4월 16일 새벽에 박지원 의원(당시)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대부분 ‘정계은퇴 선언’으로 이해했을 법하다.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4선 의원을 거치며 만 78세의 노령을 맞았다.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지청구를 들을 처지였을 텐데도 그는 5선에 도전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해서 국민의당 후보로 나섰을 때 지지해 줬던 목포시민들이 ‘민생당 박 후보’는 외면했다.
하필이면 왜 그를 기용했을까?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었을 터이다. 그러니 그에게 ‘새로운 길’이란 ‘정계은퇴→자연인으로서의 여유로운 삶’으로 여겨질 만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고 물러 앉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벼슬도 누릴 만큼 누렸다. 더 뭘 원할 게 있었겠는가.
놀랍게도 그가 국회의원 임기만료 한 달여 후에 국정원장 후보로 지명됐다. 대통령의 심복이기는커녕 ‘문 모닝’이라고 불릴 정도로 날마다 문 대통령을 비판하던 야당 인사였다. 그런 사람이 다른 자리도 아니고 국정원장에 기용됐으니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그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그 수수께끼는 그대로 남아 있다.
①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애를 과시하던 문 전 대통령과 김정은(및 그 집단)의 사이가 경색일로를 치닫던 시기였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비밀 송금의 책임을 지고 옥고를 치르긴 했지만) 박 전 원장의 역량에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②정보통 박 전 원장의 입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국내외에 광범한 인맥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측돼 왔다. 북한과 관련해서도 남다른 인맥과 정보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었다.
③김대중-노무현(과 문재인) 두 시기를 자연스레 한 묶음에 넣을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대북 불법 송금 특검’이었다. 특검수사 와중에 박 전 원장은 어떤 의미에선 희생양이었다. 진보 정권 간의 화해를 위해서는 해원(解冤)의 이벤트가 필요했다. 호남 민심의 이반이라는 홍역의 재발을 예방하는 효과도 당연히 감안 되었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나, 당시의 핵심 측근들, 그리고 박 전 원장이 설명해 주지 않는 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적절한 인사가 아니었음은 그간에도 이미 드러났었다. 박 전 원장은 작년 8월 이른바 ‘고발사주’ 의혹을 제기한 조성은 씨와 롯데호텔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했고, 그 전 2월에는 공관에서 국민의당 전직 의원들과 조 씨를 불러 5시간이나 대화를 나눴다. 조 씨가 고발 사주를 받고 그걸 박 전 원장에게 이야기하면서 ‘제보 사주’로 이어졌으리라는 의혹을 자초한 셈이다. 공관 대화에서는 정치권에 대한 협박성 발언도 나왔다.
“이혼할 사람 많을 거라고 전하라”
박 전 원장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다(조 씨가 페이스북에 쓴 글대로라면).
이는 그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다.
국정원장직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이렇다. 공인의식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위세과시를 곁들인 협박성 발언을 예사로 하고 있다. 국가정보원법 제11조(정치 관여 금지), 국가정보원직원법 제17조(비밀의 엄수), 국가공무원법 제60조(비밀 엄수의 의무), 형법 제127조(공무상비밀의 누설) 등에 대한 위반 여부를 따져봐야 할 정도의 위험한 발언들이다.
그는 퇴임 후에도 유사 발언을 이어갔다.
10일, CBS ‘김현정 뉴스쇼’에서 그가 한 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전형적인 공갈 화법이다. 과거에 공작정치가 이런 식으로 행해졌었다(박 전 원장, 방어해야 할 일 아니면 욕심낼 자리가 있어서일까?)
“윤석열 대통령 존안자료도 있다”
다음 날 박 전 원장은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장으로서 보안 준수 의무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개인정보를 위해서도 그 정도는 밝혀도 문제가 없지 않느냐”며 “누가 어떻게 (기록)됐다는 건 얘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자료도 있느냐’는 질문에는 “국정원법을 위반하면 내가 또 감옥 간다. 한번 갔다 왔으면 됐지 또 가겠느냐”면서도 “그러니 디테일하게는 얘기 못 하지만 근본적으로 있다”고 답했다.
그렇게까지 신호를 보냈는데도 윤 대통령이 취임 바로 다음날 자신을 내보낸 것에 대해 오기가 발동한 것일까?
어쨌든 위협할 것 다 하고는 “다른 국정원장이 와서 공소시효도 넘은 특정인의 자료를 공개할 경우 얼마나 큰 파장이 오겠느냐. 특별법을 통해 폐기해야 한다”고 눙쳤다. 정치 9단이라는 이름을 얻은 박 전 원장이다. 책임회피 화술이 능수능란하다. 그래도 책임을 물을 건 물어야 한다. 그 이전 어느 원장도 이런 식으로 존안 자료의 존재를 발설한 적은 없었다. 박 전 원장만이 그걸 내세워 공공연히 정치인·언론인·기업인을 위협한 것이다(지탄이 쏟아지자 그가 했다는 말이 이렇다. “공개 발언 시 더 유의하겠다.” 언론이 ‘사과’라고 했지만 이건 사과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발탁 배경·과정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국가정보중추기관의 수장으로서는 부적격자임을 확인시켜 보였다. 그의 정치행태로 미루어 그를 기용하기 전에 문 전 대통령이나 인사 참모들도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를 국정원장 자리에 앉혔는지 설명해줘야 옳다. 박 전 원장 자신도 무엇이 켕겨서, 혹은 무엇을 기대해서 정재계와 언론에 대해 협박을 했는지 밝힐 일이다.
문재인 정권, 이미 징치고 막은 내렸지만 그 잔상 혹은 그림자가 또 갈수록 태산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