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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㉚] 다시 곱씹어 보는 ‘헤어질 결심’ ①슬픔의 방식


입력 2022.10.19 08:26 수정 2022.10.21 10:19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이하 CJENM 제공


수완: 무서운 여자예요. 저 반지 뺀 거 봐요.


해준: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수완: 시집 내면 알려 주세요. 한 권 사 드릴게.


영화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 제작 모호필름, 배급 CJENM)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단 한 가지였다. 송서래(탕웨이 분)와 장해준(박해일 분)은 사귀었고 헤어질 결심을 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두 사람이 어떻게 사귀게 될지, 어느 순간에 상대에게 마음이 일었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봤다. ‘어떻게 사귀게 될지’라는 건 상대의 어떤 면에 마음이 흔들렸을지에 관한 것이고, ‘어느 순간’이라는 건 그 시작점이 언제인지 알아채고 목격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 손짓과 몸짓, 말의 내용과 형식에 모든 감각을 집중해 관찰했다.


해준이 어떤 말을 하면, 이것이 서래에 대한 마음이 담긴 대목인지 그저 해준의 인성이 드러나는 발언인지 생각했다. 서래가 말을 하면, 이것이 해준의 마음을 얻어 살인 피의자에서 빠져나가려는 자기방어적 수법인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사랑에 따른 설렘인지 진의를 파악하고자 했다. 헷갈렸다. 계속 헷갈렸다.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상상해도 맞아떨어지는 말들과 표정과 몸짓이었다.


슬픔은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서서히, 사랑은 거센 파도처럼. 송서래 역의 배우 탕웨이 ⓒ

남편이 죽자마자 결혼반지를 뺀 서래에게서 살의를 의심하는 후배 형사 수완(고경표 분)의 말이 상식선에서 맞는데도, 시 구절 같은 말로 서래를 옹호하는 해준의 말이 더 크게 들렸다. 인본주의적 형사의 태도인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서래에게 이미 마음을 뺏긴 남자의 일방적 감쌈인지는 몰랐지만, 해준의 말이 아름다운 시어로 날아와 마음에 꽂힌 건 분명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수완이 형사로서의 못마땅함과 섞어 ‘시집 나오면 한 권 사겠다’고 빈정대는데, 맥락과 상관없이 ‘어머, 정말 시 같아’ 감탄했다.


맞다. 영화를 n차 관람할 때도 항상 느꼈고, 각본집을 보면서도 다시 느낀다. ‘헤어질 결심’의 대사들은 전부 시 같다. 말도 시이고, 영상도 시적이다. 그 모든 걸 소개하자면 시리즈 10편을 가도 부족하다. 줄이고 줄여 2회를 게재하는데, 가장 좋은 대사라고도 할 수 없고 단지 ‘슬픔의 방식’과 ‘사랑의 시작’에 관한 부분만 추렸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해준이 이 말을 하는 시점에서 보면, 서래는 남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숨기고 있을 때다. 해준의 말처럼, 슬픔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이어서 ‘슬퍼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영화 끝까지 가보면, 해준의 말이 옳다. 서래는 자신의 인생에 덮쳐든 여러 차례의 고난과 고통을 꾹꾹 누르고 참고 견디며 살아왔고, 슬픔을 징징대며 표 내는 사람이 아니다. 남편을 제 손으로 죽였건 죽이지 않았건 슬픔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건 같았을 것이다. 해준은 그걸 대번에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장해준 역의 배우 박해일 ⓒ

반하여, 해준은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다.


해준: 사진 태우고, 내가 녹음한 파일 다 지우고……그것도 참 쉬웠겠네요? 좋아하는 ‘느낌만 좀’ 내면 내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까?


서래: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행복’을 언급해 놓고는 더 화가 나)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완전히 붕괴됐어요.


서래가 찾아보았듯 붕괴의 사전적 의미는 ‘무너지고 깨어짐’이다. 살인 피의자에게 고급 모듬초밥을 사주고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칫솔을 내어주고 손수 치약을 짜주던, 절대로 폭력은 안 된다며 후배에게 화를 내던 인권 형사 장해준은 완전히 무너졌다.


형사를 이용이나 하는 살인자를 사랑한 자신을 향한 책망이 아니라, 사랑에 눈이 멀어 살인자를 못 알아본 자신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서래의 마음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수사망에서 벗어나는 수법에 불과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산산이 깨졌다. 해준에게 있어 사랑을 잃은 슬픔은 분노의 파고를 타고 그의 일상, 형사로서 자부심을 포함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거칠게 덮쳤다.


사랑이 저무는, 그러나 영원한 여명을 남길 풍경 ⓒ

해준의 붕괴는 아내가 근무하는 곳으로의 전근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도망가면 끝일 줄 알았겠지만, 이포에서는 더욱 참담한 붕괴가 벌어진다. 제대로 매듭짓지 않은 사랑은 인생을 송두리째 삼킨다. 영화사적으로 길이 빛날 서래의 마지막 선택, 본 적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결행과 그것이 해준의 인생과 영혼에 끼친 결과는 모두 ‘파도’ 앞에서 이뤄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시의 위대함인가. 이 대사는 자꾸만 되뇌어진다. 나는 어떻게 슬퍼하는 사람인가, 인생의 고비에 찾아오는 아픔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하는 사람인가. 어떤 방식으로 슬픔을 맞고, 견디고, 극복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인지는 개인마다 해답이 다를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남자의 후회는 때가 늦다 ⓒ

서래가 인용했듯 공자가 말씀하셨다.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인생을 길게 산다. 서래는 물을 좋아했고, 해준은 정적이고 고요했고, 서래는 인생을 길게 살지 못했다.


그래도 해준보다 동적이어서 해준이 도망간 이포로 따라갔고, 새로운 사건을 일으켜 이전 사건부터 재수사하게 함으로써 해준의 삶을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해준의 미해결 사건이 되어 영원히 해준의 벽에 남기를 택했다. 그것이 서래가 해준과의 이별에 따른 슬픔을 견디고 영원히 헤어지되 헤어지지 않는 방법이었다. 파도처럼 거세게 밀고 들어와 모든 걸 쓸고 나가는 사랑이었다.


일상의 고요가 중요했던 해준, 자신이 완전히 붕괴됐다고 성난 파도처럼 포효하던 남자는 진실로 삶이 무너지고 영혼이 깨지는 슬픔의 파도에 휩쓸렸다. 자신의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모르고 넋 놓고 서 있던 해준은 부인이 떠나고 사랑을 잃었다. 그는 사랑을 영원히 놓치고서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혼자 남은 오랜 시간, 잉크가 물에 번지듯 서서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감당할 것이다.


[홍종선의 명대사㉛] 다시 곱씹어 보는 ‘헤어질 결심’ ➁사랑의 시작…으로 이어서.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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