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딕킨슨 전라연기 “남자배우 노출 정상화, 기쁘다”
‘말레피센트 2’ 필립 왕자, ‘마티아스와 막심’ 변호사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옥스퍼드 가문 외동아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로맨티스트에서 악역까지
[홍종선의 배우발견㊼-1] ‘슬픔의 삼각형’ 칼 역의 그 배우…에 이어서
여자친구 야야(찰비 딘 크릭 분)의 솔직한 인정과 사과로 관계를 회복한 칼(해리스 딕킨슨 분)은 유명 인플루언서 야야가 받은 협찬 여행상품으로 호화 크루즈에 승선하고, 영화 ‘슬픔의 삼각형’(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플레이그램, 공동배급 메가박스중앙(주)MEGABOX, 공동제공 (주)하이스트레인저)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크루즈에서 슬픔의 삼각형, 부와 권력에 의한 피라미드는 격렬하게 작동한다. 부자인 승객들은 무엇이든 제멋대로 이고, 선원과 직원들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대가로 하선할 때 손님들이 뿌릴 거액의 팁을 기대한다. 칼도 무임승차를 가능케 한 야야를 위해 온갖 ‘사진 시중’을 성실히 든다. 선원과 차이점이 있다면, IT 졸부에게 친절한 야야에게 삐치다 못해 웃통 벗은 마초 선원에게 눈웃음짓는 야야를 질투한 나머지 서비스팀장 폴라(비키 베를린 분)에게 선원의 복장 상태를 고자질해 해고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1부에서의 성차별 역전처럼, 2부에서도 역전이 등장한다. ‘사회주의자’로 럭셔리 크루즈 선장이자 알코올중독자 토마스(우디 해럴슨 분)와 ‘자본주의 개’로 러시아 출신 비료회사 회장이자 자칭 ‘똥팔이’ 드미트리(즐라트코 버릭)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처럼 추억의 명언으로 설전을 주고받는다. 자본주의 일상의 정점인 호화 크루즈 선장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말을 인용해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 출신의 사업가는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말로 사회주의를 반격한다.
미국 선장: 교수대에 오를 최후의 자본가는 밧줄을 판 자(칼 마르크스)
러시아 회장: 사회주의는 딱 두 곳에서만 작동한다. 그것이 필요 없는 천국, 이미 존재하는 지옥(로널드 레이건)
미국 선장: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란 언제나 고대 그리스의 것과 같다. 노예 소유자만이 갖는 자유(블라디미르 레닌)
러시아 회장: 사회주의의 문제는 결국 다른 사람의 돈도 탕진한다는 사실이다(마거릿 대처)
영화에서는 더 많은 인물의 더 많은 발언이 설전으로 오가는데 말싸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도 제일 재미있는 건 세 번째 에피소드다.
“내 남편이 이 배를 살 것”이라면서 새 주인 행세를 하는 드미트리의 부인 벨라(수니 멜레스 분)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 서비스직원 알리시아(알리시아 에릭손 분)에게 ‘만인은 평등하다’며 내가 직원하고 네가 손님 하자는 말에서 비롯된, 전 직원에게 수영을 강권하면서 시작된 소동에 상한 음식과 풍랑과 해적이 보태지며 구토와 설사, 폭발 속에 배가 침몰한 뒤. 가까스로 살아남은 8인이 떠밀려온 해안가에서 벌이는 ‘새로운 피라미드의 탄생’ 이야기가 3부다.
이제 돈과 보석이 아니라 물과 식량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권력은 모두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해 생존을 이어가게 할 수 있는 자의 것이 된다. 새로운 계급구조, 새로운 피라미디의 정점은 유일하게 맨손으로 문어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유일하게 불을 피워 요리를 할 수 있는 자! 바로 크루즈의 청소담당자였던 에비게일(돌리 드 레옹 분)이다.
작은 체구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에비게일이 크루즈에서의 서열대로 폴라 팀장의 말 ‘우리는 승객의 안위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를 따랐다면, 에비게일은 바닷가 작은 왕국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모든 손님과 동료를 위해 먹거리를 구하고 음식을 만드는, 피라미드의 최하층에서 상위층을 위해 온몸 바쳐 서비스하는 노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그리 둘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이란 게 그리 작동할 것도 아니어서, 에비게일은 음식 분배 방식을 통해 자신이 왕임을, 유일하게 자신만이 타고 온 유일한 구명정의 ‘캡틴’임을 분명히 한다. 갑부 드미트리도 문어 한 조각 앞에서 에비게일의 권력 아래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른 권력에 걸맞게, 온 국민을 먹여 살리는 노고에 걸맞은 여흥과 서비스를 바란다는 듯 에비게일은 음식을 주고 젊은 남자의 몸을 받는다. 그 남자가 바로 칼이다.
칼은 1, 2부에서보다 훨씬 선명하게 피라미드 역전의 결과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에비게일의 간택을 받은 남자가 되어 자신은 물론이고 야야에게도 더 많은 음식(프렛즐 스틱 한 상자)을 줄 수 있지만 기쁘지만은 않다. 야야의 눈치도 봐야 하고 사람들의 눈총도 의식한다. 에비게일에게 차라리 우리 관계를 공개하자고 제안하지만, 에비게일은 칼-야야 사이에 끼어들어 ‘슬픔의 삼각형’을 그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갑’ 에비게일의 거절에 ‘을’ 칼은 취할 것은 취하되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현재가 좋은 게 아니냐고 항변하나 그뿐, 아무런 힘이 없다.
남녀를 역전시켜 위계 권력에 의한 성폭력을 보여주니, 숱한 성폭력과 그에 따른 체감이 남녀 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차가 본질임이 분명하게 보인다. 배우 해리스 딕킨슨은 이 상황이 희화화되지 않도록 진지하게 접근해 진실하게 연기했다.
일종의 몸 파는 연기를 소화하는 태도랄까 연기 결을 보면서 딕킨슨의 과거 발언이 떠올랐다. 데뷔작 ‘바닷가의 쥐들’에서 노출 연기를 한 뒤 선댄스영화제에서 등에서 화제가 되자 “남자 배우의 노출을 정상화한 것 같아서 기쁘다. 여자 배우는 전신 노출 장면이 많은데 남자 배우는 그렇지 않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말만이 아닌 진정성이 ‘슬픔의 삼각형’에서 다시금 느껴졌다.
해리스 딕킨슨은 영국 배우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데, ‘말레피센트’ 2편에 필립 왕자로 출연했다. 1편에서 배우가 바뀌었는데 눈치채지 못할 만큼 도드라지게 연기하지 않았고, 헤어스타일 바꾸고 눈썹 좀 흐리게 했다고 딕킨슨 아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자비에 돌란이 연출하고 주연한 영화 ‘마티아스 막심’에서 딕킨슨은 캐나타 퀘백의 변호사 마티아스(가브리엘 달메이다 프레이타스 분)가 호감을 사야 하는 거래처 상대, 토론토에서 온 변호사 맥아피를 맡았다. 마티아스처럼 본인이 동성애자임을 철저히 숨기는 남자이자 철부지 도련님 느낌으로 마티아스를 유혹하는 인물인데, 주연이 아니면서도 캐릭터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보여줬다.
킹스맨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이야기, 프리퀄 격인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랄프 파인즈와 공동 주연했다. 옥스퍼드 가문의 외동아들 콘래드 옥스퍼드를 맡아 한 영화 내에서도 머리에 기름 바르고 턱시도를 입을 때와 일상복을 입을 때, 전장에 나가 열심히 달릴 때 시시각각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는 악역으로 분했다. 어릴 적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연에 의지해 습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 분)를 좋아할 때는 한없이 로맨틱해 보이다가도, 부모님과 사회가 바라는 아들 또는 남자의 모습을 저버리지 못해 카야를 떠날 때는 지질해 보이고, 끝내 카야를 잊지 못한 마음을 거꾸로 스토킹하듯 못살게 괴롭힐 때는 천하의 나쁜 놈인 체이스 앤드류를 실감 나게 연기했다. 잘생긴 외모가 체이스의 악랄함과 못남을 증폭시켰다.
지난해 연이어 봤으면 ‘가재가 노래하는 곳’과 이미지가 너무 달라 더 놀랐을 ‘슬픔의 삼각형’, 지금이라도 놓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향후 낭패감을 줄이기 위해 해리스 딕킨슨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올해 영화는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월드시네마 극영화)을 받은 영국 영화 ‘스크래퍼’가 보인다. 가족 코미디라는데 공개된 스틸을 보니 진정 딕킨슨인가, 또 새롭다. 아직 국내 개봉 일정이 공개된 바 없는데, 지난 6일 폐막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만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서 야야를 연기한 아름다운 배우 찰비 딘 크릭은 2022년 8월 29일 세균성 패혈증으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