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미국인들의 원죄 인종갈등 한풀이 한마당된 미대선
오바마든 매케인이든 미국 이익 우선할 것…정가 냉정하길
"돌릴 때마다 난 짐 크로를 부른답니다"
짐 크로. 그는 실제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짐 크로는 흑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1830년대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을 짐 크로라 통칭하며 그들을 조롱했다. 짐 크로는 니그로와 동의어로 여겨졌으며 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가 됐다.
짐 크로는 토머스 다트머스 라이스라는 백인 연예인이 부른 노래의 주인공이다. 이 노래는 당시 미국에서 대히트를 쳤다고 한다.
"돌려요 돌려요
그렇게 돌려요
돌릴 때마다
나는 짐 크로를 부른답니다"
(케네스 데이비스, <미국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 것>중에서)
노래로 인해 미국 전역에 전파된 짐 크로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멍청이 봉제인형의 모습이었다.
´짐 크로 신드롬´은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흑인과 백인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장 짐 크로 대기실, 짐 크로 공장 입구, 짐 크로 공장창문까지 흑인들의 영역을 구획짓는데 일조했다.
백인 간호사는 흑인 환자를, 흑인 간호사는 백인 환자를 돌볼 수 없게 됐고 흑인과 백인학교를 분리 운영함에 따라 흑인학교는 백인학교에 제공되는 정기기부금의 10%를 받을 수 없게 됐으며 이로 인해 수업의 질은 자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흑인에게 아예 고등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는 주도 있었는데 이 상황은 20세기를 지나서까지 계속됐다.
더 심각한 것은 짐 크로로 인해 흑인에게 투표권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아 적어도 남부에서는 흑인선거권의 종말을 야기시켰다. 남부 전역의 흑인들은 19세기말 대부분과 20세기초 내내 백인 여성을 겁탈했다는 이유로 심리 없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심지어 교수형 자체가 오락거리인양 신문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와츠, 흑인 폭동의 시발점
와츠.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허름한 집들이 늘어선 가난한 동네. 와츠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래 세상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던 이곳은 1965년 여름 전미국 언론의 1면 톱을 장식했다.
주민의 98%가 흑인이었던 이곳에서 경관 한명이 음주운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흑인 청년이 탄 차를 길가에 세운 것이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 됐다. 흑인 청년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 순식간에 돌과 병, 콘크리트 조각이 경찰들을 향해 던져졌다.
그후로 엿새동안 와츠는 흑인 시위대들과 주방위군 간의 전투가 이어졌고 결과는 사망자 34명, 부상자 1천명, 체포 4천명, 재산피해 3500만 달러로 나타났다.
6일만에 진정된 와츠의 폭동은 그러나 여러 도시로 확산, 그 이듬해인 66년, 또 1년뒤인 67년 시위대의 숫자도 늘어났고 그만큼 사망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68년 "지금까지 난 흑인들에게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일했다. 이제 난 이들이 돈을 벌어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한 마틴 루터 킹은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살해됐다.
와츠 사건은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991년 이웃한 로스앤젤레스에서 똑같이 재현됐다. 한인타운의 엄청난 피해로 우리로서도 남의 나라 일양 볼 수 없게 만든 ´로드니 킹´ 사건은 사건의 발단인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구타, 체포 그로 인한 폭동이라는 ´예정된´ 수순으로 이어졌다.
축제로 시작, 축제로 끝난 2008 미 대선
로드니 킹 사건 10년후의 미국은 짐 크로로 통칭되던 흑인들의 진출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명의 흑인을 각각 다른 부문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했다. 콘돌리자 라이스와 콜린 파웰은 당시만 해도 흑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처럼 여겨졌다.
스포츠 계의 타이거 우즈, 방송계의 오프라 윈프리도 미국을 움직이는 흑인 명사이고 2002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할리 베리가 오스카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들은 아직도 ´배가 고팠다´. 윈프리나 우즈. 파웰과 라이스로는 2% 부족했다. 미국의 많은 지역들은 아직도 흑인과 백인 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부족한 2%는 버락 오바마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
2008년 미국 대선은 폭우속에서도 투표장 앞에 줄을 지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흑인 유권자들 사진 한장에 그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1백여년이 넘게 자신이 살아온 땅에서 받아왔던 설움의 한을 풀려는 마음을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44대 대통령은 흑인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버락 오바마는 2년전만 해도 정가와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경선에 나왔을 때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라고 단언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쟁쟁한 경력의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순간부터 미국내 흑인들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희망의 염원이 폭풍우를 무릅쓴 기나긴 투표소 앞의 행렬로 이어졌다.
선거는 카니발, 한바탕의 축제,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풀이다. 적어도 흑인들에게 있어서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한바탕 축제라 할 수 있다. 오바마가 됐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모든 점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야 있으련만 오늘 이순간 그들에게는 이 축제를, 이 축제의 여운을 즐길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한국내 오바마 친소 경쟁 꼴불견
오바마가 당선된 것을 두고 5일 하루 대한민국의 정가는 시끄러웠다. 민주당은 아침부터 ´미국 보수 = 공화당´이라는 지극히 명쾌한 이분법 등식으로 공화당의 몰락은 보수의 몰락이고 미국 민주당의 승리는 진보의 승리라면서 들뜬 모습을 보였다.
신이 난 민주당은 의원이든 대표든 할 것 없이 ´현정부가 공화당 인맥만 가까이 했으므로 현정부의 외교가 걱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바마가 당선되고 상하원을 민주당이 독식했다고 해서 한국의 민주당에 어떤 이득이 될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미국 민주당이 진보라고? 역대 세계 전쟁은-하다못해 베트남 전쟁도-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일어났다.
청와대는 급히 브리핑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와 가까워서 걱정없다고 밝혔다. 가히 그 야당에 그 정부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정부라면 "오바마의 당선을 축하할 일이나 그 누가 됐든 한미관계는 변함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비추는 논평이면 훨씬 어른스럽고 믿음직했을 것이다.
오바마든 매케인이든 그 누가 됐든 간에 한국의 어느 정당에 이가 된다거나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뻑´이요, 아둔함이요, 멍청함이요, 유치한 논리다.
그들은 소속 정당을 불문하고 외교가 됐든 경제가 됐든 어느 정책이건 미국의 이익에 우선할 것이다. 그들의 잔치는 그들의 몫이다. 그들의 잔치를 진정으로 축하할 양이면 쓸데없이 이념이나 정당을 갈라서 편식하지 말고 평소에 두루두루 인맥을 형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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