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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구의 난 - 흔들리는 백제의 왕권 [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 역사③]


입력 2025.02.23 10:15 수정 2025.02.23 10:16        데스크 (desk@dailian.co.kr)

반란은 언제 일어날까? 봉건국가에서는 왕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왕권이 흔들리면서 틈을 보이거나 혹은 왕권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숨도 못 쉬는 상황이 되면 다른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백제의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의 난은 전자에 해당되지만, 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원전 18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소서노, 형 비류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서 남하한 온조가 십제라는 나라를 세운다. 뒤이어 형 비류의 세력을 흡수해서 백제로 국호를 바꾼다. 하지만 서기 475년, 백제는 국가 멸망급의 참사를 겪는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쳐들어와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의 목이 잘린 것이다.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었으니 나라가 멸망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개로왕이 직전에 피신시킨 태자 문주가 세력을 규합해서 남쪽으로 몽진을 떠났다. 지금의 공주 공산성인 웅진에 새로운 수도를 정하고, 한숨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왕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외적의 침략에 왕이 죽고, 수도를 잃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해구의 반란이었다. 그렇다면 해구는 누구일까?


공주 공산성 (직접 촬영)


해구와 그가 일으킨 반란을 알아보려면 먼저 그가 속한 해씨에 대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중국 사서에 대성 팔족이라고 나오는 백제의 유력 귀족 가문 중 하나가 바로 해씨다. 온조왕 때부터 등장한 해씨는 부여 출신으로 한성을 세력권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개로왕이 죽고 한성이 함락당했을 때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태자인 문주가 왕위에 오르자 측근 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지금의 국방부 장관인 병관좌평에 임명된다. 아마 같이 피난을 온 처지인 해씨 세력을 중용했고, 대표격인 해구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구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딴 마음을 품었다. 왕권이 너무 허약해서 욕심을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9월에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解仇)가 도적을 시켜 왕을 해치니 끝내 돌아가셨다.

서기 477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년에 나오는 기록이다. 해구가 도적을 시켜서 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으로 아마도 이 내용은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이후에 적혔을 것이다. 문주왕은 아버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손에 죽은 지 3년 만에 믿었던 신하인 병관좌평 해구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아무리 허수아비라고 해도 왕을 죽이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과 조짐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해 4월 내신좌평에 임명된 문주왕의 동생 곤지가 7월에 사망했다. 그 사이인 5월에는 웅진에 검은 용이 나타났다. 실제로 검은 용이 나타날 리는 없었을 테니까 아마도 이후에 벌어진 곤지와 문주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7월과 9월에 곤지와 문주왕이 세상을 떠났다.


곤지의 죽음이 문주왕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본다면 그의 죽음 역시 해구가 연루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문주왕까지 제거한 해구는 그의 아들 삼근을 다음 왕으로 세운다. 그의 나이 불과 13세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모든 권력은 해구의 손에 들어왔다. 삼근왕과 관련된 첫 번째 기록에 정치와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고 나온다. 이제 해구와 해씨의 세상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린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기록은 다소 뜻밖이면서도 허무하다.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불과 다음 해인 478년 봄에 좌평 해구는 은솔 관등의 연신과 함께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에 의해 잇달아 공격을 받고 패배하고 만다. 대두성이 함락되면서 해구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같이 반란을 일으킨 연신은 고구려로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가족들은 모두 웅진으로 끌려와서 목숨을 잃었다. 그 전해 삼근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해구는 왜 다음 해 봄에 웅진이 아닌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반란을 진압한 진씨 세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씨 역시 해씨처럼 백제 초기부터 활동한 대성팔족 중 하나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상을 해보자면 문주왕이 해구를 비롯한 해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진씨와 손을 잡을 기미를 보이자 왕을 시해하고 아들인 삼근왕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진씨 세력의 반격으로 인해 위기에 몰리자 근거지인 대두성에서 연씨 세력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진씨 세력에 의해 반란이 진압당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서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문주왕을 죽이면서까지 버텨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아마 연씨를 제외한 다른 대성 팔족들이 모두 손을 잡고 권력을 독점할 가능성이 높았던 해씨 세력을 견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구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삼근왕 역시 다음 해 11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백제의 혼란은 당분간 이어진다.


정명섭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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