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그냥, 너라서 좋은 건데"… 미니의 낭만적인 생존 비결

편은지 기자 (silver@dailian.co.kr)

입력 2025.06.24 08:00  수정 2025.06.24 10:00

미니코리아 19회 제주 미니런(MINI RUN) 체험기

차 싣고 배 태워 제주까지… 열정으로 덮은 고생길

"차를 샀더니 문화가 왔다"… 車브랜드 유일 '팬 문화'

'20년 운영 경력+찐팬+키다리 아저씨'가 만든 '유일무이' 경쟁력

ⓒ미니코리아



"정말 달리기 좋은 도로가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점심을 포기할까요?"


새벽 2시 행담도 휴게소에서 내리 달려 오전 9시 목포항에서 차를 배에 싣고, 출발 12시간 만인 오후 2시 제주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친 몸을 일으켜 겨우 차에 앉았을 때, 무전기를 통해 이런 말이 들려왔다.


새벽 2시부터 먹은 거라곤 물과 샌드위치 뿐이었지만, 이후 들려오는 팀원들의 응답은 하나같이 "좋아요"였다. 두 귀를 의심했으나 이들의 광기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 길로 곧장 점심을 내팽개치고 서귀포 자연 휴양림 속으로 내달렸다. 소형 프리미엄 수입차 브랜드 '미니(MINI)'의 동호회, 미니코리아(이하 미코)가 주최하는 '2025 미니런'의 시작이었다.


제주항에 도착해 하선하는 미니 차량들ⓒ미니코리아

2006년 시작돼 올해로 19회차를 맞은 '미니런'은 매년 새로운 도시에서 미니 애호가들을 하나로 묶고, 역사와 팬덤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다. 올해 2025 미니런 개최지는 제주로, 차량은 총 67대, 참가자는 무려 100명에 달한다.


밤을 새워 도로를 달리고, 자차를 직접 배에 싣고 내리는 피로도 높은 일정이지만, 이들에게는 '인생에서 꼭 한 번 참가하고 싶은' 꿈의 무대로 꼽힌다. 실제 올해 2025 미니런 참가 신청은 7초 만에 접수가 마감됐다. 참가 신청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스트레칭하고, 모의 연습까지 불사할 정도다. 이들에게는 미니런이 임영웅 콘서트고, 지드래곤 콘서트다.


차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각별하다 한들, 이토록 고생을 자처하는 이유가 뭘까. 풍경 좋은 길을 달리기 위해 흔쾌히 밥을 굶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2025 미니런'의 3박 4일 여정을 직접 동행해봤다.


 고생을 사서하는 요상한 사람들… 그들이 '미니'에 열광하는 이유
ⓒ미니코리아

한 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숫자. 67대의 미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황금같은 연휴를 반납하고, 수십만원의 참가비를 내면서까지 고생길에 오른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제주까지 마냥 차를 타러 온 것도, 친목을 쌓으러 온 것도 아니다. 이들에게 미니는 마치 게임 속 아바타에 남들 보다 예쁜 옷을 입히기 위해 흔쾌히 유료 결제를 하듯, 남들과 다른 자아를 잔뜩 투영한 '또 다른 나'다.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같은 옷을 입은 미니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감가상각 걱정에 마음 속으로만 담아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형광색 차들이 이 곳에선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다. 도장면과 유리창엔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스티커들로 가득하고, 그릴에는 저마다 다른 고뱃지가 붙어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흰색, 검은색 차가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는 곳이다.


2025 미니런에 참가한 한 참가자. ⓒ데일리안 편은지 기자

이런 차에서 내리는 차주들은 뭘 예상했던 그 이상이다. 쨍한 핫핑크색 추리닝을 입고 '미니 찐팬'이라는 글자가 적힌 모자를 손수 제작해 쓰는가 하면, 미니런의 대표 컬러인 빨간색으로 머리 끝을 물들인 회원도 있다. 단순히 차를 주행하는 것을 넘어 '미니'라는 브랜드 자체를 온 몸으로 즐기러 온 셈이다.


'모모 성주'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참가자는 "원래 미니를 타다가 국산차로 바꿨는데, 다시 미니로 돌아왔다"며 "미니를 타는 날은 옷도 더 젊게 입으려 신경쓰게 되고, 머리도 만지게 된다. 미니를 탄다는 것 만으로 일상이 바뀌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이 앙증맞은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대부분 30~50대 남성으로 구성돼있단 점이다. 가장 많을 것이라 예상했던 30대 여성은 절반도 되지 않았고, 많게는 50대 후반, 20대는 한 두명에 불과했다. 수많은 동년배들이 넓은 패밀리카로 눈을 돌릴 때, 이들은 몇 번이고 미니를 갈아 치웠다.


ⓒ미니코리아

경제력이 있고, 가족 구성원 수가 많다고 해서 사이즈가 가장 큰 컨트리맨을 선택하는 것 또한 아니다. 실제로 이번 미니런에서 컨트리맨은 전체 67대 중에 5대도 채 되지 않았다. 5도어 모델 또한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뒷좌석에 초등학생 딸을 태운 가족, 2인 가족의 일상용 차. 사실상 한국에서 통하는 '패밀리카'의 개념이 이곳에선 마치 짜여진 것처럼 '3도어 미니'로 통일된 듯 했다. 어디로 숨었는지, 서울에선 좀처럼 마주치기도 어렵던 JCW모델들 역시 죄다 이곳에 모여있었다.


미코에서 경기지역장을 맡고 있는 최상진씨는 "컨트리맨이 안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미니에서는 실용성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며 "미니에서 실용성을 찾을 거면 국산차를 사는 게 맞다. 이 곳은 벤츠 E클래스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 1세대 미니를 튜닝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고객이 아니라 미니라는 브랜드의 '팬'이 되기로 자처한 이들에게 실용성은 처음부터 '없어도 되는' 단어였다. 이들은 실내 공간이 더 넓고, 더 잘 달리고, 더 좋은 옵션이 있고, 더 저렴하게 만들어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미니라서' 미니를 탈 뿐이다.


 "미니를 '제대로' 타세요"… 20년 노련함 빛나는 체계적 운영
ⓒ미니코리아

말 그대로 미니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100명씩 모여 있으니, 노는 법도 유별나다. 미니런 행사의 전반은 이들이 미니를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매력으로 꼽는 '달리는 맛'에 철저히 초점이 맞춰졌다.


인상 깊은 건 3박 4일간 하루 대부분을 도로에서 보내는 일정이 단순히 속도를 내는 것에만 치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귀여운 얼굴과 달리 재빠른 속도에서 오는 짜릿함은 물론, 짧은 전장에서 나오는 날렵하고 경쾌한 코너링, 수십대가 줄지어 제주 해안가를 달리며 느끼는 소속감까지. 차를 타고 달리면서 느낄 수 있는 '맛'을 다양하게 펼쳐낸 게 핵심이다.


체계적이고 꼼꼼한 운영은 수십대의 미니가 동시에 도로를 달리는 낭만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숨은 비결이다. 제주 도로 특성상 고속도로 보다는 일반 시내 도로와 왕복 1차선 도로가 주를 이루는 탓에 언제, 어디서, 어떤 변수가 생겨날 지 모르는 상황. 틀에 짜여진 듯 조직적이고 막힘없는 운영체계가 없었다면 사고 없이 안전한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로 잰듯 반듯하게 정렬된 차량들 앞으로 참가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 사진을 한 장을 찍기 위해 운영진들은 주차 가능한 장소를 수개월 전 미리 물색하고, 당일 수십대의 차량을 직접 통제한다.ⓒ미니코리아

미니가 한국에 첫 발을 디딘 2005년 온라인 카페를 개설하고, 20년 째 미코 회장을 맡고 있는 박재형씨는 '한국의 미니 팬덤'을 만들어낸 창시자다. 미니의 한국 진출 이듬해인 2006년 '미니를 타고 국내에서 가장 멀리 가보자'는 생각에서 30명의 참가자와 함께 제주를 방문한 게 미니런의 시초가 됐다.


그는 "미니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1세대 미니를 직수입해 타고 있었는데, 미니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미니를 타는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됐다"며 "첫 해 30명을 겨우 모아 어렵게 진행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 더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됐다. 20년을 이어갈 수 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미니런에 참가해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20년차의 노련함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박 회장을 주축으로 사진, 정비, 디자인 등 각 역할을 맡은 운영진이 있고, 그 아래 전국 5곳의 지역장이 지역별 회원을 관리하는 식이다. 그 어떤 보상 없이, 철저히 미니에 대한 애정 하나로 재능기부를 자처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들은 제주 이곳 저곳을 달리는 100명의 동호회인들이 '잘 놀게' 하기 위해 늘 한발 앞서 동선을 훑는다. 67대의 차량을 총 8개의 팀으로 쪼개고, 각 팀에는 선두와 후미를 맡는 리더들이 정해져있다.


각 팀이 정해진 목적지에 다다르면 리더는 미리 목적지에서 기다리던 운영진과 무전기를 통해 교신하고, 일반 차량의 동선에 방해되지 않도록 빠른 주차를 돕는다. 해안가를 바라보며 달리는 중간중간 언제 와있었는 지 모를정도로 발 빠른 사진 기사는 꼭 귀신을 보는 것만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도 지체없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도로 우측에서 달리는 미니 행렬을 사진에 담고 있는 운영진. 주행 코스 곳곳을 달리다보면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운영진들을 만나게 된다.ⓒ데일리안 편은지 기자

참가자들에게 미코와 미니런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다보면 끝은 언제나 박 회장에 대한 감사함으로 귀결된다. 박 회장과 운영진에 대한 동호회인들의 존경어린 눈빛이 매년 미니런을 더욱 완성도 있게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는 듯 하다.


경기지역장 최상진 씨는 "지금 이렇게 즐길 수 있는 건 대장님(동호회인들이 박 회장을 부르는 별칭) 덕분"이라며 "수익을 내는 동호회가 아니고, 회원수도 4만명에 달하다 보니 본업과 병행하며 이끌기가 버거운 순간이 많았을 텐데, 20년 간 직접 발벗고 나서서 지금도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車 제조사 중 유일한 '팬덤 문화'… 브랜드를 이끄는 힘
2025 미니런 '레고 미션'을 달성한 참가자들이 찍은 완성본.ⓒ미코 회원 제공

이 동호회가 특별한 건 단순히 미니 차주를 모으고, 즐기는 수준을 넘어 '미니'라는 브랜드에 대한 이해도를 함께 높여나간다는 데 있다.


미코의 프로그램 중에는 미니런처럼 축제의 성격을 띠는 행사가 있는가 하면, 처음 미니를 구매한 초보 오너들을 위해 미니의 브랜드 역사부터 조작법, 정비, 고질병, 사진 팁 등을 전수하는 클래스가 열리기도 한다. 회원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미니를 타고 전국 맛집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도 주기적으로 개최된다.


'하이 민정'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회원은 "처음에는 미니가 예뻐서 샀고, 어떤 제조사의 차를 사도 그렇듯 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카페에 가입했다"며 "그런데 정보를 얻기 위해 나간 행사에서 브랜드의 역사와 차량 관리법, 정이 넘치는 사람들까지 예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어오게 됐다. 이 동호회에 애정이 생겨나면서 미니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도 더욱 높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미니코리아

미니 브랜드를 운영하는 BMW그룹코리아의 역할도 흥미롭다. 이 정도 규모의 맹목적인 팬들이 모여있다면 차량 판매와 연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 대고 싶을 법도 하건만, 묵묵히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자처하고 있어서다. 미코 행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이들이 스스로 만든 문화를 100% 즐길 수 있도록 필요시 차량 지원 등의 작은 도움을 줄 뿐이다.


덕분에 미코는 제조사의 입김에 구애받지 않고 동호회를 위해 힘을 쏟을 수 있고, 적극적인 운영진의 열정에 동호회인은 결속력을 높인다. 이는 결국 미니 차량의 재구매와 브랜드 충성도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자동차 제조사와 고객의 관계가 또 있을까.


이런 선순환 구조는 한국에선 좀처럼 흥행하기 힘든 소형차 영역에서 유일하게 성장을 거듭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토대가 됐다. 국내 진출 첫해 761대의 판매 실적을 올렸던 미니는 지난 2019년 프리미엄 소형차 브랜드 최초로 연 1만대 판매를 돌파했고, 지난해까지 총 13만대에 가까운 판매량을 올렸다. 한국 상륙 첫 해와 비교하면 무려 165배 성장한 수치다.


BMW그룹코리아 관계자는 "미니만큼 팬덤을 가지고 있는 자동차 브랜드는 떠올리기 힘들다. 단순히 잘 만들어진 자동차를 구매하는 개념을 넘어, 미니라는 브랜드 자체를 사랑하고 아낀다. 미니런에 참여하기 위해 미니를 구매한 고객도 있다"며 "국내 팬분들을 위해 더 다양한 라인업과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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