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 속 한국의 전략적 중재
인공지능 등 ‘얇지만 폭넓은 합의’ 도출
KIEP “합의의 한계와 이행전략 마련 해야”
지난 5월 제주에서 열린 APEC 통상장관회의가 미중 전략경쟁, 보호무역주의 심화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얇지만 폭넓은 합의’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나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발간한 ’2025 APEC 통상장관회의 결과와 시사점에 따르면 2025 APEC 통상장관회의는 미・중 전략경쟁과 보호무역주의 심화 등 복잡한 통상환경 속에서도 디지털 전환・AI・공급망 연결성 이슈 논의에 진전을 기하며 APEC이 여전히 의미 있는 다자 협력 플랫폼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갈등과 다자주의 약화라는 흐름 속에서 APEC의 조정자 역할과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주관 KIEP APEC연구컨소시엄사무국 사무국장은 “이번 회의가 지정학적 갈등과 다자주의 약화라는 흐름 속에서 APEC의 조정자 역할과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며 “10월 정상회의에서는 논의된 의제들이 구체적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세부 이행계획과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한국, 신통상 의제 주도…합의의 실제와 한계
의장국 한국은 디지털 경제, 인공지능, 지속가능한 공급망 등 새로운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디지털 전환의 불가역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AI 활용과 규범 정립, 개인정보 보호, 데이터 이동 자유화 등에서는 회원국 간 이견이 뚜렷했다. 한국이 제안한 ‘AI for Trade’ 이니셔티브는 무역원활화와 AI 이슈를 APEC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계기가 됐다.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는 디지털 격차 해소, 안전한 생태계 조성, 인프라 상호운용성 강화, 데이터 흐름 촉진 등이 공동목표로 설정됐다.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표현이 빠졌는데, 데이터 이동 촉진과 신뢰 제고에 합의해 개도국 포용과 선진국 기술 선도의 균형을 꾀했다.
AI 논의에서는 AI 기반 통관절차 향상 등 정부 행정 단계의 활용이 명시됐다. AI 정책의 국내 정보공유 및 민간 역량 강화도 강조됐다. 다만 AI 안전·거버넌스 논의는 회원국 간 견해차로 제외됐다. 표준 논의 역시 자발적 정보교환에 그쳤다.
공급망 분야에서는 미중 공급망 주도권 경쟁 속에서 한국이 ‘지속가능한 공급망 포럼’을 개최해 민관 합동 대화와 산업 전반의 민간 참여 확대를 제안했다. 이 제안은 회원국들의 지지를 받았다. 공급망 논의는 물류에서 기후·환경까지 확장되며 회복력과 지속가능성 강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합의의 폭과 깊이, 그리고 남은 과제
합의문에서 지정학적 이슈(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등)는 의장성명문에 담고, 민감한 현안은 논의를 유예하는 방식으로 도출됐다.
WTO 개혁, 아태자유무역지대(FTAAP), 환경상품·화석연료 보조금 등 전통적 의제에서는 입장 차이로 인해 구체적 진전이 제한적이었다.
데이터 이동 촉진에서는 ‘자유로운’ 표현을 삭제해 데이터 주권을 존중하는 대신, 국경 간 교류 기반을 확보하는 절충이 이뤄졌다. 여성, 중소기업, 토착민 등 경제주체의 참여 확대는 유지됐지만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핵심 문구는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최종 선언문에서 빠졌다.
실용적 다자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합의의 구체성과 실행력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한계가 남았다는 분석이 제기된 이유다.
KIEP 연구진은 “APEC의 합의 내용과 수위는 WTO, G20 등 다른 다자협상의 기준이 될 것”이라며 “10월 정상회의에서는 논의된 의제들이 구체적 결과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세부 이행계획 및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외교통상 차원에서 활용하는 전략 필요”
2025년 APEC 통상장관회의는 미중 전략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보호무역주의 심화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개최됐다. 미국은 상호호혜주의와 공정무역을 강조하며 기존 자유·개방 원칙과 충돌했다. 대다수 회원국은 푸트라자야 비전 2040에서 제시한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하고 비차별적이고 예측 가능한 무역환경의 유지를 강조했다.
개도국은 포용적 통상환경 달성을 요구하는 등 회원국 간 입장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EC은 조정자이자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하며 ‘얇지만 폭넓은 합의’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공동선언문에는 WTO 개혁의 포괄적 필요성, 디지털 전환의 불가역성, AI와 무역의 연계, 지속가능한 공급망, 환경 서비스, 포용적 성장 등 다양한 의제가 담겼다. 하지만 각 의제별로는 구체적 합의보다는 원칙적 지지와 추가 논의 수준에 머물렀다. FTAAP 논의 역시 후속작업 개시 합의에 그치며 경제통합의 동력이 약화된 현실을 반영했다.
KIEP 연구진은 “회원국들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외교통상 차원에서 활용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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