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제조업 기반 없이는 AI 산업도 사상누각
위기의 석유화학 산업은 전면적인 구조조정이 시급
정부, 노란봉투법 등으로 기업 괴롭히지 말아야
자국 기업 지원하는 트럼프를 닮아야해
대한민국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석유화학이나 철강 같은 전통 제조업을 무시하면 안 된다. ⓒ데일리안 AI 이미지 삽화.
많은 사람이 AI(인공지능)만 잘 발전시키면 나라 경제가 좋아질 것으로 믿고 있다. AI를 통해 생산·물류·마케팅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온라인과 사이버 세계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물적 토대와 실물경제가 있어야 한다. 챗GPT 같은 대형 AI 모델은 일반적인 구글 검색보다 10배 이상 전력이 소요된다. AI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데 2027년에는 40%가 전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대규모 발전설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AI만 흥왕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전통 제조업이 망한다면 사상누각(砂上樓閣), 즉 모래 위에다 집을 짓는 격이다.
대한민국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석유화학이나 철강 같은 전통 제조업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인력 고용이나 경제 안보 측면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제조업이 위기다. 석유화학·철강·디스플레이·태양광·2차전지·건설업이 모두 그렇다. 중국의 저가 공세, 미국의 관세 폭탄, 국내외 수요 침체 등 악성 3박자가 겹쳤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하던 석유화학 산업이 벼랑 끝에 섰다며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작년 수출액만 약 480억 달러로 반도체·자동차·일반기계에 이어 4위다. 석유화학 산업은 원유에서 정제한 나프타를 분해, 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 등 기초 유분을 만든 뒤 여기에서 플라스틱·고무를 비롯한 생활용품을 생산한다. 그런데 중국과 중동에서 공격적으로 설비를 늘리는 바람에 공급 과잉이 빚어졌고, 글로벌 불황으로 수요 부진까지 겹쳐 2022년부터 적자가 심화되었다. 중국의 에틸렌 생산설비 규모는 2014년 1950만t이었으나 2024년에는 5274만t으로 2.7배나 증가했다. 중동에서는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의욕적으로 시설을 늘리고 있는데, 특히 NCC(나프타 분해 설비) 공정을 배제하고 원유를 직접 화학제품으로 전환하는 혁신 기술을 추진하고 있다.
진달래 핀 여수 영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여수산단의 석유화학 공장들.ⓒ 최홍섭
여수에 있는 영취산은 매년 3월 말이면 전국에서 진달래가 가장 먼저 핀다. 영취산 북쪽으로는 석유화학 업체들이 즐비한 여수국가산업단지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우울한 뉴스의 진원지로 변했고, 올해는 진달래 빛깔마저 바래졌다. LG화학은 여수공장에서 석유화학 원료인 스티렌모노머(SM) 생산을 중단했고, 롯데케미칼 역시 여수공장의 일부 라인을 멈췄다.
국내 에틸렌 생산 3위로 한때 순이익 1조원을 기록했던 여천NCC는 최근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공동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이 3000억원을 수혈키로 하면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대주주끼리 의견 차이가 크고 추가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라 안심할 수 없다. 2021년만 해도 9조원 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던 롯데케미칼·LG화학·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 등 국내 4대 업체들은 올 상반기 영업손실만 4762억원을 기록했다. 업계에서는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동률의 마지노선을 70%로 보는데, 현재 60%로 내려간 곳이 수두룩하다. BCG(보스턴컨설팅그룹)는 “특단의 구조조정이 없으면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의 절반이 3년 안에 도산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석유화학 생산품. ⓒ 박진희 그래픽 디자이너
이런 가운데 정부는 20일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과잉설비 감축 및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 △재무건전성 확보 △지역경제·고용 영향 최소화 등 ‘석유화학 산업 구조개편 3대 방향’을 밝혔다. 생산설비 감축·폐쇄와 사업 매각 등 자구(自救)노력을 하는 기업에게는 각종 금융·세제 인센티브를 주되, 구조조정을 회피하는 기업이 득을 보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석유화학 업계도 이에 맞추어 NCC를 최대 25%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대산·울산·여수 산단(産團)의 통합 작업도 빨라질 전망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통 제조업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0년 가까이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역대 정부는 인원 감축 등의 고통이 따르는 구조조정을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정부는 기업간 합병에 제약을 둔 공정거래법도 바꾸어야 한다. 현행법은 인수·합병(M&A) 때 시장점유율이 1위가 되면 결합이 제한된다. 석유화학 업계는 이 규제가 구조조정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석유화학 업종만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8월 초 전국 제조업체 2186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력 제품이 ‘레드오션(시장경쟁이 극심한 단계)’이라는 응답이 비금속광물(95.2%), 정유·석유화학(89.6%), 철강(84.1%), 기계(82.9%) 순으로 높았다. 범용(汎用) 제품은 중국 등의 직격탄을 맞고 있으니 ‘블루오션’을 찾아 고부가 제품 비중을 늘리는 노력이 시급하다.
ⓒ 박진희 그래픽 디자이너
세계철강협회(WSA)에 따르면, 글로벌 철강 수요는 올해 17억 4000만t으로 4년 연속 감소하고 있다. 중국은 덤핑 공세로, 미국은 50%라는 고율 관세로 한국 철강을 압박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이름을 날렸던 디스플레이는 이미 상당 부분 중국의 손으로 넘어갔고, 미래 성장동력으로 불리던 태양광이나 2차전지도 흔들리고 있다.
물론 제조업에 부정적인 뉴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그나마 최악의 결과를 피했던 비결은 이른바 ‘K-조선’ 덕분이다. 우리나라 조선은 중국의 맹추격 때문에 사양산업이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그동안 선제적인 구조조정 작업을 벌인 덕분에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해양플랜트, 잠수함 등 고부가 영역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미국은 중국에 패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해군력 강화가 시급했고 그러자면 조선업의 부활이 절실했기에 한국에 손을 내밀었다. ‘MASGA(미국의 조선업을 위대하게)’라는 작명까지 하면서 미국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트럼프 시대를 맞아 세계는 다시 제조업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선진국들은 설계와 디자인 같은 고부가 영역에 주력하는 반면, 제조나 생산은 인건비가 저렴한 후진국에 하청을 주는 ‘글로벌 아웃소싱’에 주력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닫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광기 어린 관세 정책을 펴는 배경에는 미국을 다시 세계 최강의 제조업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걸 말이다.
J.D.밴스(41) 미국 부통령이 쓴 자전적 소설이자 넷플릭스 영화로도 유명한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는 자동차의 디트로이트와 철강의 피츠버그 등 한 때 미국 제조업의 심장부였다가 지금은 공장들이 문을 닫고 쇠퇴한 ‘러스트 벨트’의 아픔을 묘사했다. 트럼프 2기에 이 소설이 주목을 받으면서 마치 미국의 제조업 부활을 촉구하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에쓰오일의 석유화학 부문인 울산 파라자일렌(PX) 공장.ⓒ 에쓰오일
전문가들은 또 코로나19가 제조업 강화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각국마다 마스크와 백신 등 각종 의료 용품이 시급했는데, 제조업 기반이 있는 나라는 수급이 상대적으로 원활했다. 제조업 여부가 국가안보와도 직결된다는 점을 모두 깨달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8월 14일 경쟁력 상실로 고사(枯死) 위기에 몰린 전통 제조업에 대한 산업 재편 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신산업 중심으로 성장동력 창출을 서두르는 동시에, 우리가 강점을 지녔던 전통산업도 포기하지 말고 경쟁력 회복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문제 인식은 정확하다.
그러나 민주당과 정부가 추진 중인 노란봉투법, 2차 상법 개정안, 중대재해처벌법 강화, 법인세율 인상 등의 조치를 보면 기업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다. 손경식 경총(經總) 회장은 “노란봉투법에 따르면 하청업체 수백 곳과 하나하나 노사협상을 해야 하고 해외공장을 지을 때도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누가 한국에 투자하며 기업들의 대탈출만 부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업들의 호소를 엄살로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글로벌 전사(戰士)다. 정부와 여당은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 이상으로 기업들을 지원해야 한다. 트럼프는 온갖 욕을 들어가면서도 저렇게 자기 나라 기업들을 아끼는데, 우리나라 정부가 우리 기업들이 아주 싫어하는 일을 기어코 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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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홍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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